변산반도의 불교-진표 율사, 천년 고찰 내소사와 개암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1310
한자 邊山半島-佛敎眞表律師千年古刹來蘇寺-開巖寺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시대 고대/삼국 시대/백제,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대/남북국 시대/후백제,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진정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지역 내소사 -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내소사로 191[석포리 산82-1]지도보기
관련 지역 개암사 -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개암로 248[감교리 714]지도보기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반도에 깃들어 있는 통일 신라 시대 고승 진표의 사상과 신앙, 그리고 천년 고찰 내소사개암사.

[변산반도에서 불교의 시작]

변산반도가 속하였던 백제에 불교가 전해진 시기는 384년 9월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변산반도에 불교가 유입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전라북도 지역의 백제 불교 사원 발굴 조사를 살펴볼 때, 7세기 이후일 가능성이 크다. 변산반도의 대표적인 사찰인 내소사(來蘇寺)개암사(開巖寺)도 이 시기에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내소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633년(백제 무왕 34) 혜구두타(惠丘頭陀)가 대소의 소래사(蘇來寺) 두 사찰을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개암사는 『개암사 연혁기(開巖寺沿革記)』에 따르면, 634년(백제 무왕 35)에 묘련 선사(妙蓮禪師)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두 사찰에서는 삼국 시대 백제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진표 율사와 불사의방]

남북국 시대 변산반도는 당시 대표적인 고승과 관련된 이야기를 품고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원효(元曉)진표(眞表)다. 원효와 관련된 곳은 개암사 뒷산 우금암(禹金巖)에 있는 원효방(元曉房)이다. 원효방원효의상(義湘)이 676년(문무왕 16)에 참선하였으며, 이후 ‘원효방’ 또는 ‘원효굴’이라고 불렸다는 전설이 있다. 백제 부흥 운동의 중심지였던 주류성(周留城)으로 추정되는 우금암에서 원효의상이 실제로 머물렀는지는 의문이 든다. 아마도 이것은 백제 부흥 운동의 중심지였던 만큼 신라와의 친밀성을 강조하기 위한 허구일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러나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원효의 고적으로 인식되어 고려 시대 이규보(李奎報)[1168~1241] 등 수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고 시를 남겼다.

남북국 시대 변산반도의 불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진표이다. 진표는 완산주(完山州)에서 태어나 12세에 금산사(金山寺) 순제 법사(順濟法師)에게 출가하였다. 이후 진표는 760년(경덕왕 19) 변산불사의방(不思議房)에 들어가 3년 동안 수도하였다. 그러나 깨우침을 얻지 못해 벼랑으로 몸을 던지자 미륵보살(彌勒菩薩)과 지장보살(地藏菩薩)이 나타나 계법(戒法)과 진성(眞性)을 전한다.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이후 진표는 금산사(金山寺)를 중창하고 속리산 법주사(法住寺)와 금강산 발연사(鉢淵寺)를 창건하였다. 진표의 법상종(法相宗)은 미륵과 아미타를 중시한 태현(太賢)으로 대표되는 신라 중앙의 법상종과 달리 미륵과 지장을 중시하였으며, 수행 방식으로 점찰법(占察法)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진표의 신앙은 고려 말~조선 초까지 변산반도는 물론 인근 지역까지 영향을 끼쳐 두건을 착용한 지장보살이 조성되었고, 고창 참당사(懺堂寺)[현재 선운사 참당암]에서는 ‘생회(栍會)’라는 이름으로 점찰법이 이어졌다. 현재 불사의방 터로 전하는 곳은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中溪里) 의상봉(依上峰) 동쪽에 위치한다. 이 터는 산꼭대기에서 나무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야 하는 암벽에 있는데 그 규모는 12㎡ 내외로 매우 좁다.

[내소사의 역사와 불적]

한국을 대표하는 고승인 원효진표의 자취가 남아 있는 변산반도에는 많은 사찰이 들어섰다. 그 가운데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찰이 내소사이다. 내소사변산반도 남쪽 끝에 있는데, 취봉(鷲峰)에서 뻗은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사찰을 둘러싸고 있으며, 절 주변은 전나무 숲이 울창하다. 변산의 대찰로 내소사가 손꼽혀 왔지만, 사찰의 역사를 기록한 사적기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앞서 언급하였듯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혜구두타가 창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절 이름이 소래사인 것과 관련하여 소정방(蘇定方)이 시주한 것에서 연유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미륵보살이 머문다는 도솔천과 관련된 ‘도솔래의(兜率來儀)’와 관련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규보가 1200년(신종 3)에 쓴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에 ‘변산 소래사’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경준(申景濬)[1712~1781]의 『가람고(伽藍考)』에도 ‘소래사’라고 기록되어 있어, ‘소래사’라는 이름이 적어도 18세기까지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1850년(철종 1) 청림사(靑林寺) 터에서 옮겨 온 고려 동종(銅鍾)에 그 내력이 적혀 있어 ‘내소사’라고 바뀐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내소사에 남아 있는 불적 가운데 오래된 것은 고려 시대에 만들어졌다. 고려 시대에 조성된 불적 가운데 온전한 것은 내소사 삼층석탑(來蘇寺三層石塔)[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124호]이 유일하다. 다만, 봉래루(蓬萊樓) 계단 가운데 안상이 새겨진 석재도 고려 시대의 것으로 여긴다. 부안 내소사 대웅보전(扶安來蘇寺大雄寶殿)[보물 제291호] 앞뜰에 있는 내소사 삼층석탑은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과 상륜부로 이루어진 신라의 일반적인 석탑의 모습을 띠고 있다. 하층 기단과 상층 기단에는 귀기둥과 함께 각각 하나의 탱주가 새겨져 있다. 3층으로 이루어진 탑신석에는 모두 귀기둥만 새겨져 있는데, 2층과 3층 탑신은 1층 탑신에 비해 급격하게 축소되었다. 지붕돌은 4단의 받침이 있고, 상륜부는 노반(露盤)과 보륜(寶輪)의 일부만 남아 있다. 이 석탑은 통일 신라 석탑의 양식을 따르면서도 급격한 체감률과 축소된 규모, 단순화된 세부 표현 등으로 보아 고려 때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부안 내소사 동종(扶安來蘇寺銅鍾) [보물 제277호]으로 일컬어지는 고려 범종은 원래 청림사에 있던 범종이다. 청림사내소사선계사(仙溪寺), 실상사(實相寺) 등과 함께 변산의 4대 사찰로 알려져 있는데, 내소사를 제외한 3개의 사찰은 지금은 모두 폐사되었다. 1222년(고려 고종 9) 청림사에 걸기 위해 조성한 범종은 음통과 종을 걸기 위한 용뉴(龍鈕)가 있고, 종 위아래에는 넝쿨무늬가 새겨진 문양 띠가 있다. 9개의 연꽃 봉오리[연뢰(蓮蕾)]가 있는 연곽(蓮廓) 4개가 위쪽 넝쿨무늬 문양 띠에 붙어 있다. 종 표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撞座)와 불상·보살상을 새겼다. 특히, 위쪽 문양 띠 위에는 고려 후기 범종의 전형적인 특징인 세운 꽃무늬 띠[立狀花文帶]가 있다. 이 범종에는 내소사로 옮겨진 내력도 새겨져 있는데, 청림사가 폐사될 당시 매몰되었다가 1850년에 내소사로 옮겼다고 한다.

내소사에서 간직하고 있는 불적 가운데 백지묵서(白紙墨書)『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보물 제278호]은 내소사가 조선 초에도 융성하였음을 보여 준다. 이 사경에는 영락 을미년, 즉 1415년(태종 15) 이씨 부인이 죽은 남편 유근(柳謹)의 극락왕생을 위해 법화경을 옮겨 썼다는 기록이 있다. 내소사를 대표하는 성보(聖寶)는 꽃살 무늬가 아름다운 대웅보전을 들 수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집인 대웅보전은 1633년(인조 11)에 청민 대사(淸旼大師)가 중창하였다. 이때 대웅보전 안의 삼존불(三尊佛)도 함께 조성되었다. 또한 대웅보전 내부 후불벽 뒷면에 그려진 「백의관음보살상(白衣觀音菩薩像)」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보살 좌상 벽화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웅보전이 건립되고 7년 후인 1640년(인조 18)에 설선당(說禪堂)과 요사(寮舍)가 건립되었다. 1700년(숙종 26)에는 「내소사 영산회괘불탱(來蘇寺靈山會掛佛幀)」[보물 제1268호]이 조성되었다. 석가모니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이 괘불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위해 대웅전 앞에 내걸던 그림이다. 또한, 1902년(고종 39) 관해 선사(觀海禪師)가 대웅보전을 중창하였고, 1914년에는 변산실상사에 있던 봉래루를 이곳으로 옮겨 중건하였다. 한편, 일주문에서 대웅보전으로 가는 길 왼쪽 산기슭에는 조선 중기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10명의 내소사 고승의 승탑(僧塔)이 있다.

[개암사의 역사와 불적]

개암사변산의 동편에 있는 사찰이다. 절 뒷산을 능가산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우금암이라고도 한다. 우금암 일대는 일각에서는 백제 부흥 운동의 중심지였던 주류성으로 알려져 있다. 개암사는 1640년 월파자(月坡子) 최경(崔勁)이 지은 「법당 중창기문(法堂重刱記文)」과 1658년(효종 9) 금파(金波) 여여(如如)가 그것을 바탕으로 엮은 『개암 중건 사적기(開巖重建寺蹟紀)』 등으로 그 역사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법당 중창기문」의 별기로 인용된 ‘원효방 상량문’에 묘련(妙蓮)의 제자 도침(道琛)이 복신(福信)과 함께 이 지역에서 백제 부흥을 위한 전투를 펼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1941년에 엮은 『개암사 연혁기』에서는 백제 묘련 선사가 개암사를 창건하였다는 것으로 와전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부안현(扶安縣)의 불우(佛宇) 가운데 개암사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고려 말 문인인 이곡(李穀)[1298~1351]의 시에 언급된 내·외도솔사(內·外兜率寺) 가운데 외도솔사가 개암사로 추정되고 있어 14세기 이전에 창건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한편, 1414년(태종 14)에는 개암사 주지 선탄(禪坦)이 폐허인 사찰을 중창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개암사는 정유재란(丁酉再亂)을 거치면서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이후 1636년(인조 14)에 계호 대사(戒浩大師)가 중창 불사를 하면서 황금전(黃金殿)을 대웅보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654년(효종 5)에는 덕언(德彦)과 경묵(敬黙)이 동서양실(東西兩室)을 중건하였으며, 1658년에는 밀영(密英)·혜징(惠澄) 등의 승려가 몇 년에 걸친 불사를 마쳤다.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중창 불사가 이어졌다.

개암사 불적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조선 후기의 목조 건축 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대웅전이다. 대웅전은 다포 양식의 정면과 측면이 각 3칸인 단층 팔작지붕집이다. 지금의 대웅전은 1783년(정조 7)에 승담(勝潭)이 중수한 것이다. 한편, 1960년 개암사 대웅전의 개보수(改補修) 과정에서 수습된 기와에서 ‘정유재란 직후 대웅보전은 마름으로 지붕을 이었으며, 천계(天啓) 5년 즉 1625년(인조 3)에 우반동(愚磻洞)[유정랑(柳正郎),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의 조부 유성민]의 농막에서 기와를 구워 올렸다’라는 것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대웅전 안에는 17세기 중엽 활약한 조각승 영철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목조 석가 삼존불 좌상(木造釋迦三尊佛坐像)이 있다.

한편, 개암사에는 부안군 상서면 청림리 서운마을의 한 절터에 있던 것을 부암댐 건설 때문에 1996년에 옮겨 온 석조 지장보살 좌상이 있다. 청림사지 지장보살상은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다. 청림사지 지장보살 좌상의 특징인 방형의 얼굴, 낮고 안정적인 하체에 비해 짧은 상체, 직선적인 내의와 군의 띠 매듭 등은 15세기 전반의 불상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로 보아 개암사로 옮겨진 청림사지 지장보살상 역시 15세기 전반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보살상은 변산반도진표가 중요시하였던 미륵 신앙·지장 신앙의 영향이 컸음을 보여 주는 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사찰에는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179호로 지정된 개암사 응진전 16나한상(開巖寺應眞殿十六羅漢像)이 봉안된 응진전(應眞殿)이 있다. 괘불을 내걸 때 필요하였던 괘불 지주에는 ‘기사년 월일 □□청선[己巳年月日□□淸禪]’이라는 명문이 있는데, 여기서 ‘청선’은 1633년 내소사 대웅보전에 삼존불을 봉안하였다는 청민 선사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이 괘불 지주는 1629년(인조 7)에 만들어진 것이다. 개암사 대웅전 앞뜰에는 건륭(乾隆) 6년, 즉 1741년(영조 7)에 만든 석조(石槽)도 남아 있다.

[변산반도의 암자와 폐사]

변산반도에는 원효와 관련이 있는 원효방, 진표와 관련이 있는 불사의방과 같은 이름 있는 암자 터 외에도 수많은 암자와 폐사가 있다. 대표적으로 통일 신라 때인 692년에 부설 선사가 창건하였다는 월명암(月明庵)이 있다. 월명암은 현재도 그 법등(法燈)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역사만큼은 파란만장하다. 월명암은 정유재란 당시 소실된 것을 진묵 대사(震黙大師)[1562~1633]가 중건하였고, 1848년(헌종 14)에 성암 화상이 크게 중건하였다고 한다. 이후 1900년대 전반 전소와 재건을 반복하다가 1954년에 현재의 암자가 들어섰다. 내소사와 함께 변산 4대 사찰로 일컬어지던 실상사청림사, 선계사는 모두 폐사되었다. 실상사부안군 변산면 중계리 천왕봉과 인장봉 사이에 있던 사찰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통일 신라 신문왕 9년에 초의 선사가 창건하였고, 조선 시대에 양녕 대군(讓寧大君)이 중창에 관여하였다고 한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대웅보전과 정면 3칸, 측면 2칸의 나한전(羅漢殿) 등의 전각이 있었다고 전한다. 6·25 전쟁 당시 전소되어 터만 남아 있던 것을 발굴하여 실상사의 규모와 위상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청림사부안군 상서면 청림리에 있는 사찰인데, 부안 지역에서는 서운마을에 있던 곳을 구 청림사지(舊靑林寺址), 청림마을에 있던 곳을 신청림사지(新靑林寺址)라 부른다. 신청림사지는 1222년에 동종을 주조한 곳이다. 이곳에서는 지금도 청림사가 새겨진 기와 조각들이 확인되기도 한다. 또한, ‘청림사’가 써 있는 청자 철화병(靑磁鐵畵甁)도 전한다. 청림사지에 있던 지장보살 좌상은 근래에 개암사로 옮겨졌다. 한편 선계사부안군 상서면 청림리에 있었다고 하나,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이 밖에도 변산반도에 의상사(義湘寺), 등운사(登雲寺), 문수사(文殊寺), 영은사(靈隱寺), 칠성암(七星庵), 옥천암(玉川庵) 등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그 이름과 터만 전한다.

[변산반도 불교의 특징]

변산반도에는 내소사개암사와 같이 삼국 시대에 창건하였다는 사찰이 있고, 원효의상 같은 신라 고승의 이름을 빌린 암자와 사찰이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변산반도에 불교가 뿌리내리고 번창한 것은 진표불사의방에서 미륵보살과 지장보살을 직접 만나 깨달음을 얻은 것과 관련이 깊다. 내소사는 원래 소래사로 미륵보살이 머물고 있다는 도솔천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개암사는 도솔사로 불렸다. 이처럼 변산반도를 대표하는 두 사찰 모두 미륵보살의 상주처와 관련이 있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진표의 점찰회와 관련 있는 두건을 착용한 지장보살상이 조선 초에 조성되기까지 하였다. 이를 통해 변산반도는 미륵 신앙과 지장 신앙을 기반으로 한 진표 법상종이 꽃을 피운 곳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변산반도의 불교 사원들은 거의 초토화되었다. 그러나 17세기 중엽부터 중창 불사가 이루어져 다시 번창하였다. 이 시기에 석가모니 신앙과 함께 바닷길의 안녕과 관련이 깊은 관음 신앙이 번성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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