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1304
한자 百濟復興運動-扶安周留城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김병남

[정의]

660년 8월부터 663년 10월까지 전라북도 부안 지역의 주류성을 중심으로 일어난 백제 부흥 운동.

[개설]

백제가 멸망한 후 백제 유민들은 과거 백제의 영역에서 백제 부흥 운동을 벌였는데, 그 중심지가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에 있는 주류성이었다.

[부흥 세력, 주류성에 주목하다]

서기 660년 7월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이 나당 연합군에게 함락된 후 백제 유민들은 곧바로 침략군을 물리치기 위한 노력을 전개하였으며, 이를 ‘백제 부흥 운동’이라고 부른다. 백제 각지에서 일어난 부흥 세력은 연대하여 즉각적으로 수도를 재탈환하려고 하였는데 도성을 수복하여 백제의 연속성을 다시금 확보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성공하지 못하여 사비성은 여전히 나당 연합군의 수중에 있었다. 그럼에도 백제를 다시 세우려는 부흥 운동은 ‘금강 서쪽[江西]’의 임존산을 기점으로 점차 금강 동쪽으로 확산되어 갔다. 따라서 부흥 운동의 주도 세력은 백제 전 지역으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이끌어 내기 위한 다른 조치가 필요하게 되었다. 백제는 185년 전인 475년 외부 세력[고구려]의 침공으로 수도[한성]가 유린당하고 왕마저 죽은 상황에서 웅진으로 천도하여 국가를 재건한 경험이 있었다. 따라서 나당 연합군의 침공으로 수도[사비]가 점령당하자 국가 부흥을 위한 새로운 중심지를 모색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주목받은 곳이 나당 연합군의 침략이 비켜 간 금강 이남의 남쪽 지역이었는데, 이곳은 백제 무왕(武王) 때 천도를 염두에 두었던 금마저[현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와 광역 지방 조직인 5방의 하나인 중방 고사성[전라북도 고부] 등의 ‘대도시’를 배후에 둔 지역일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수도의 함락으로 경제 물류망인 금강 유역까지 마비된 상황에서 가장 고려되어야 할 사항은 지속적인 대외 교류를 수행할 지역이었다. 그런데 부안은 왜국과의 교섭에 유리한 고사성이 주변에 존재하고, 또 공주와 부여로 들어가는 해상로의 길목으로서 대중국·대왜 사절선이 빈번하게 드나들던 항구가 있다는 강점을 가졌다. 부안 죽막동 유적에서도 알 수 있듯 부안은 고대부터 백제, 고려, 조선 시대까지 다양한 해양 제사 문화의 변천 과정을 보여 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찾으며 대외 교역 창구로서 기능해 왔었다.

따라서 이 점에 주목한 복신(福信) 등의 부흥 세력은 지속적인 투쟁과 저항의 근거지이자 수도의 기능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중방 고사성 일대를 주변에 둔 주류성을 주목한 것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속담처럼 새로운 백제는 새로운 중심 주류성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두량이성, 고사비성 전투와 주류성]

백제 유민들의 국가 재건 노력은 치열하였다. 수도인 사비가 함락되고 의자왕(義慈王)이 포로로 잡혀 간 다음 해인 661년 2월 초 부흥군은 다시 사비성을 탈환하려 하였지만 도침(道琛) 등이 이끄는 부흥군이 웅진강 어귀에서 나당 연합군에게 대패하였고, 이에 따라 복신 등의 사비 방면 부흥군도 포위를 풀고 남쪽으로 퇴각하였다. 신라군은 사비성에서 농성 중인 당 주둔군을 구원할 수 있었지만, 아예 부흥 세력을 물리치고자 다시 복신 등의 부흥군을 쫓아 두량이성과 고사비성까지 진격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3월 5일 두량이성에 진입하기 시작한 신라군은 마침내 고사비성 밖에 진을 치고 3월 12일부터 부흥군의 거점인 주류성[부안군 위금암산성=우금산성]을 치기 위해 고사비성을 공격하였다.

이 두량이성과 고사비성에 대해서, 종래에는 고사비성은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 두량이성은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 당시 신라군의 작전 반경이 너무 넓고 멀다. 즉 고사비성과 두량이성 사이에는 동진강과 금강이 가로막아 신라군이 고사비성 밖의 진영에서 출발하여 두 강을 도하하여 두량이성을 공격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현실적이지 않았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점을 해소하고자 ‘고사비성(古沙比城)’을 아예 ‘고사비성(古泗沘城)’의 오기라고 주장하여, 당시 신라군이 사비성[부여] 바깥에 진영을 설치하고 가까이의 청양 두량이성을 공격한 것이라고 억지로 짜 맞추기도 하였다. 하지만 당시 신라군의 목표가 두량이성이 아니라 주류성을 공격하는 것이었다는 점, 또 고사비성이라는 명확한 지명, 나중에 신라군이 퇴각 경로인 빈골양[정읍시 태인면] 등을 고려하면 두량이성은 주류성 근처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만약에 나당 연합군이 웅진강에서 도침 등의 부흥군을 쫓아 임존성을 공략하였다면 두량이성은 정산으로 볼 여지가 있다. 하지만 백제 사비 시대 이래 ‘중방 고사성’이었던 고사부리=고사비=고사[고부]란 확정적인 지명이 나오는 상황에서 두량이성을 정산으로 보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두량이성 자체가 주류성이 될 수도 없으니, 이는 중방 지역 내 고사성 주변과 연계된 지역에서 찾아야만 할 것이다.

이때 주목되는 것이 완산군의 영현인 ‘두이현(豆伊縣)’이다. 명칭상으로도 두량이성(豆良伊城)을 약칭으로 ‘이성(伊城)’이라 불렀듯이, 백제의 ‘두이현’ 또한 ‘이현(伊縣)’이라고 약칭하였기에 신라에서 이성현이라 개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지정학적으로도 두이현[완주군 이서면]은 당시 완산군의 관내이므로 북으로 금마저군[익산], 서쪽으로 피성[김제], 남서로 고사비성[정읍]과 연결된다.

신라군이 고사비성에 다다르기 전에 먼저 맞닥뜨린 곳이 ‘두량이’였다. 따라서 두량이→고사비→주류성을 놓고 보면 신라군이 작전을 전개하는 방향과의 거리가 무리 없이 설명된다.

또 『삼국사기(三國史記)』「지리지」에는 ‘두이현’을 ‘왕무(往武)’라고 불렀다고 나온다. 전형적인 한자식 지명인데, 이러한 지명 변화는 고사부촌을 ‘평왜(平倭)’, 거사물을 ‘융화(隆化)’라고 한 것과도 비슷하다. 그런데 고사부촌은 고사비성[고사부리성]이고 거사물은 거물성[남원]과 관련이 있음을 고려할 때 나당 연합군과 백제 부흥군의 접전이 벌어졌던 기억과 관련된 지명 개명이다. 이럴 경우 ‘왕무’도 이와 연관된 것이 된다.

그렇다면 백제 부흥 세력은 왜 주류성 일대에 주목한 것일까? 부흥 세력의 최종 목적이 백제의 ‘재조(再造)’였다면 가장 먼저 취할 행동은 새로운 왕의 옹립과 왕도의 선정이다. 이미 부여풍(扶餘豐)을 옹립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졌기에 그에 걸맞은 왕도의 선정이 필요하였다. 그럼에도 주류성[우금산성]은 방어에는 유리한 입지일지 몰라도 국가를 경영할 수도로서의 기능성은 모자란 곳이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주유(州柔)는 전지(田地)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가 척박하니 농잠(農蠶)할 땅이 아니요 방어하고 싸울 장소“라고 나온다. 하지만 같은 기록에 “삼한에서 가장 기름진 곳”이라고 언급된 피성처럼 지금도 호남평야라 부르는 곡창 지대인 익산-김제-부안-정읍 일대를 아우르는 기름진 땅이며 백제 시대에는 중방 고사성 지역이었던 곳을 배후에 두고 있다.

따라서 백제 부흥군은 사비성의 탈환이 늦어짐에 따라 이곳에 관심을 집중하고 새로운 수도로서의 기능을 부여하여 정부를 구성할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물론 후보지는 이 언저리에 있는 금마저, 고사, 피성 등이었을 것이지만 유사시 왕실과 정부가 안전하게 보전될 주류성[부안]을 수도로 삼았던 것이다.

[부여풍의 귀국과 부흥 백제 수립]

백제 부흥 운동 은 급속도로 확산되어 이미 국가 재건의 열쇠인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 왜에 체류 중이던 부여풍의 귀환을 요구한 상태였다. 부여풍의 왕위 계승은 부흥 백제 세력의 중앙 지휘부를 견고하게 하고, 그 지휘 아래 조직적 명령 체계를 갖추어 단기간에 국가의 부흥을 완성시키는 데 중요한 필수 조건의 하나였다.

이에 따라 661년 9월 부여풍은 왜국을 출발하여 귀국길에 오른다. 당시 부여풍 일행이 왜국의 나가츠노미야[長津宮]를 출발점으로 삼아 백제 남단까지 도착하는 데는 최소 한 달 이상의 기간이 소요되었다. 더군다나 부여풍이 이용하였을 해로는 견당사(遣唐使)의 오당지로와 달리 남해안의 리아스식 해안을 따라 이동하는 데다 다시 그 남단을 거쳐 북으로 황해안[서해안]을 따라 주류성[부안]까지의 거리가 더해진 것이기에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였다. 특히 연안 항로를 선택하는 경우 섬이 많고 조류의 움직임이 복잡하면 안전한 항로를 선택하기가 매우 어려운데, 한반도의 서남해안은 조류의 영향력이 매우 크고 방향의 지역적 편차도 심해 신경을 기울여야 한다. 아침저녁으로 해풍과 육풍이 바뀌는 데다 바람이 주위 지형과 부딪혀 흐름이 변하는 등 배의 운항이 매우 불규칙적이고, 운항 일정도 늘어지기 십상이다.

더군다나 서기 659년의 견당사는 2척의 배에 불과했지만 661년 9월의 부여풍은 휘하에 5,000명의 군사까지 동반하였고, 그뿐 아니라 각종 장비와 무기, 군량까지 한꺼번에 움직여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그 규모는 수군 170척이 동원될 정도였다. 이렇게 되면 부여풍과 5,000명의 군사를 실은 선단의 이동 속도는 더욱 떨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동력선이 없는 전통 시대의 선박은 오로지 인력(人力)과 풍력(風力)을 이용한 항해만 가능하였기에 속도 또한 생각보다 많이 나오지 않았고, 기상 변화 등의 제약 조건도 무시할 수 없었으며, 더군다나 660년 백제 중앙 정부가 붕괴됨에 따라 지방 조직도 원활하지 않았을 것을 염두에 둔다면 서남해안 일대 백제 관할 구역의 직접적인 안내와 보급 등의 기능도 마비되었을 것을 고려해야 한다. 이처럼 원활한 식량·식수의 공급 문제와 비좁고 불결한 공간에서 빈발하는 전염병 등을 감안했을 때 수시로 육지에 정박하거나, 때때로 항해 중에 진법 훈련까지 했을 것이라고 고려한다면 생각 이상으로 항해 거리나 기간이 지체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여러 악조건으로 부여풍 일행의 귀환 길은 적어도 60일 이상이 걸려 주류성 근방에 도달하는 최악의 상황이 되어 버렸다. 부여풍이 9월 말 일본의 후쿠오카에서 출발하였다면 아무리 순조롭게 부안 주변에 도달하여도 거의 11월 말이었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바다에서의 항해는 언제나 예측 불허였기에, 관련 기록을 보건대 일행은 좀 더 늦은 12월이 되어서야 도달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렇게 부여풍의 구원군이 도착한 곳은 가파리 해안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현재의 부안 일대로 추정되는 곳이다. 또 구원을 위해 도착한 왜군이 진을 친 곳도 소류성, 즉 주류성이었다.

한편, 662년 3월 기록에 부여풍을 ‘백제 왕’이라 표현한 것을 보면, 이 시점에 이르면 복신과 부여풍 사이에는 어느 정도 정치적 절충에 도달하여 부여풍이 왕으로서 인정받기에 이르렀고, 『일본서기』의 기록처럼 662년 5월에 이르러 부여풍은 정식 ‘왕위를 이어받아[繼其位]’ 즉위하기에 이른다. 왕위 등극 의식은 백제의 재건을 알리는 뜻깊은 자리였기에 의식에 참석한 백제 유민과 부흥군 등 대부분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겠지만,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오른 부여풍과 간난고초를 겪으며 백제의 재건을 이끌어낸 복신에게는 남다른 눈물이었을 것이다.

[백제의 마지막을 장식하다]

663년 들어 백제의 주요 근거지는 가림성(加林城)[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임존성(任存城)[충청남도 예산군]과 함께 주류성 및 피성을 아우르는 ‘고사주[고부]’ 정도에 불과하게 되었다. 더불어 복신의 도침 살해, 풍왕(豊王)의 복신 살해 등 내분마저 겹쳐 부흥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지고 만다.

이러한 ‘[부흥] 백제’의 정변은 나당 연합군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고, 신라는 곧바로 주류성과 고사주를 공격할 계획을 세운다. 백제군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위해 당군 측에서는 본국에 병력 증원을 요청하였고,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백제 측에서도 왜국에 원군 파견을 요구하는 등 대처하고 있었다.

당나라 장수 유인궤(劉仁軌)의 주류성 공격 제안으로 나당 연합군은 손인사(孫仁師)·유인원의 당군과 문무왕(文武王)의 신라군으로 육군을, 유인궤·두상·부여융이 지휘하는 수군을 편성하여 각기 출발한 후 백강[동진강]에서 합세하여 주류성과 고사주로 진군하였다.

웅진강[금강]을 출발한 당 수군은 서기 663년 8월 17일 백강에 도착하여 전열을 갖추었고, 마침내 8월 27일 당 수군 170척과 이호하라노 기미오미[廬原君臣]가 이끄는 1만여 명의 왜군이 1차 전투를 벌였다. 『일본서기』 663년 8월 기록에 “일본군이 불리하여 물러났다[日本不利而退].”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왜군이 꽤 큰 타격을 입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튿날인 8월 28일 다시 왜의 본군과 당 수군 사이에 2차 전투가 벌어졌는데, 모두 네 차례의 접전 끝에 백제와 왜 연합군은 패배하고 말았다.

백제·왜 연합군은 나당 수군의 화공과 협공을 받아 변변히 싸워 보지도 못하고 대패하였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군사가 살아남기 위해 바다로 뛰어들었다가 익사하였다. 무수한 배들은 나당 수군의 당파(撞破) 작전으로 깨졌으며, 남은 배들은 퇴각하려 하였으나 뱃머리를 돌릴 수 없어 화공에 속수무책으로 400척이 불타 버렸다. “연기와 화염이 하늘에 그득하고[煙炎灼天]”, “바닷물이 붉게 물들었다[海水爲丹]”라는 표현은 당시 엄청난 수의 백제·왜 연합군 배들이 불타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나당 연합의 수군이 전투를 벌이는 동안 육군은 곧장 주류성으로 진격하였다. 나당 연합군은 8월 17일 주류성을 포위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8월 28일 백강 해전에서 백제·왜 수군은 대패하였는데, 풍왕마저 사라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더 이상 항거하지 못하고 마침내 9월 7일 왕자 부여충승(扶餘忠勝) 등이 왜군과 함께 항복하며 주류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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