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434
한자 禹金山城
이칭/별칭 주류산성,위금암 산성,우진고성,울금바위 산성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산65-1
시대 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강원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74년 9월 24일연표보기 - 우금산성 전라북도 기념물 제20호 지정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7년 - 우금산성 전주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14년 - 우금산성 전주문화유산연구원에서 발굴[시굴] 조사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16년 - 우금산성 전북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 조사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18년 - 우금산성 전북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 조사[동문 터, 남문 터]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19년~2020년 - 우금산성 전북문화재연구원에서 시굴 조사
현 소재지 우금산성 -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산65-1지도보기
성격 산성
양식 포곡식 석성
크기(높이,길이,둘레) 3,960m
문화재 지정 번호 전라북도 기념물 제20호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우금산에 있는 고려 시대~조선 시대 산성.

[개설]

우금산성(禹金山城)우금산(禹金山)[329m]의 울금 바위를 중심으로 서쪽과 동쪽의 산줄기를 연결하는 포곡식(包谷式)의 석성이다. 백제 멸망 후 부흥 운동의 본거지 중 한 곳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현재 남아 있는 산성은 고려 시대~조선 시대의 것이다. 우금산성은 1974년 9월 24일에 전라북도 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되었다.

[건립 경위]

우금산성에 대한 직접적인 문헌 자료는 없지만, 백제 멸망 후 백제 부흥 운동(百濟復興運動)을 펴 오던 복신(福信)이 끝까지 싸우다가 나당 연합군에 패한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위치]

우금산성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봉은마을에 있다. 부안군 상서면 소재지에서 보안면 방면의 국도 제23호선을 따라 3㎞ 정도 가면 오른쪽에 ‘개암사지(開巖寺址) 입구’ 이정표가 나온다. 개암사지 방면으로 1.2㎞ 정도 따라가면 오른쪽에 ‘부안 우금산성’의 표말이 세워져 있으며, 이곳으로부터 길을 따라 680m 가면 우금산성의 남문 터와 복원된 성벽이 눈에 띈다. 남문 터는 성 내부로 들어가는 정문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성 내부에는 협소한 평탄 대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민가와 암자가 있다. 우금산성으로 가는 또 다른 길은 다음과 같다. 개암사지 뒤편에서 600여 m 정도 오르면 울금 바위가 나오는데, 울금 바위 부근은 산성의 서쪽에 해당한다. 이곳에서부터 북쪽으로 능선 길을 따라가다 보면 우금산의 최고봉에 이르고, 동쪽으로 능선 길을 따라가다가 남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으로 내려오면 동문 터에 도착한다. 동문 터에서 남쪽으로 능선 길을 따라가다가 서쪽으로 경사면을 내려가면 남문 터에 도착한다.

[형태]

산성의 전체 둘레는 약 3,960m이다. 평면 형태는 남벽이 넓고 북벽이 좁은 사다리꼴이며, 여러 개의 봉우리와 남쪽의 계곡부를 아우르는 이른바 사고중관(四高中寬)의 지형을 하고 있는 포곡식의 석성이다. 성벽은 기본적으로 자연석을 이용하여 외벽과 내벽을 먼저 쌓아 올리고, 그 사이에는 할석과 흙을 이용하여 막채움하는 협축법(夾築法)으로 쌓았으며, 경사가 급한 구간은 경사면에 내탁하여 축성하였다. 2014년 전주문화유산연구원에 의해 실시된 남문 터 주변의 성벽 조사에서 조선 시대 초기 읍성의 축조 방식과 유사한 형태, 즉 지면 위에 판판한 석재로 지대석(地臺石)을 놓고 그 위로 약간 뒤로 물린 후 대형 할석을 줄 쌓기 방식으로 쌓은 부분이 확인되고 있어 후대에 개축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산성 내 최고봉인 북쪽의 우금산에 북장대(北將臺)가 있고 남쪽 수구 주변에 남장대(南將臺)가 있는데, 남장대와 북장대 주위에는 협소한 평탄 대지가 조성되어 있다. 성문은 남쪽 수구 주변에서 남문 터가, 동벽 중앙부에서 동문 터가, 울금 바위 북쪽에서 서문 터 등이 확인되고 있으며, 이 중에서 동문 터와 남문 터가 조사되었다. 동문 터는 정상부와 연결된 주 능선과 접한 경사면에 입지하고 있다. 동문 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개거식(開拒式) 성문으로 확인되었다. 북쪽 측벽석의 잔존 양상으로 보아 수축·개축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차 문 터 개구부(開口部)의 규모는 너비가 약 3.9m, 확인 길이가 약 3.5m이며, 2차 문 터는 너비가 약 3.3m, 길이가 7.1m이다. 추정 남문 터는 산의 주 계곡이 합수(合水)하여 흐르는 곳으로 성내 가장 낮은 지형에 위치한다. 문 터의 통로부는 잔존하고 있는 주초석(柱礎石)을 기준으로 하면 측면 2칸의 개거식(開拒式) 성문으로 추정되며, 길이가 780㎝, 너비가 480㎝이다.

[현황]

우금산성은 백제가 망한 후 백제 부흥을 위하여 복신이 일본에 망명해 있는 왕자 부여풍(扶餘豊)을 받들고, 유민을 규합하여 최후 항쟁을 벌였던 주류성(周留城)으로 비정되고 있는 곳 중 한 곳이다. 동문 터 조사에서 출토된 유물은 어골문(漁骨文)과 격자문(格子文)이 타날된 평기와와 부령(扶寧)명 기와, 청자와 분청사기 편 등이고, 남문 터에서는 선문계(線文系) 평기와와 백자 저부 편 등이 출토되었다. 성의 내부 중 가장 낮은 곳은 남쪽 수구지 및 남문 터 주변으로, 계곡을 따라 협소한 평탄 대지가 곳곳에 마련되어 있다.

평탄 대지에는 묘암사지(妙岩寺址), 칠성암지(七星庵址), 정관암지(正觀庵址) 등의 절터가 전해 오고 있다. 이 중에 남문 터와 가장 가까운 묘암사지에 대한 시굴 조사가 1997년 전주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실시되었다. 이때 지표상에서 백제 시대의 삼족 토기(三足土器) 편과 통일 신라 시대의 당초문(唐草文) 암막새 등이 채집됨에 따라, 산성 내부에 유물과 관련된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 결과 모두 6동의 건물 터가 확인되었으며, 고려 시대~조선 시대의 묘암(妙庵)명 기와, 부령명 기와, 천순(天順) 8년명[1464년(세조 10)] 기와, 그리고 만력(萬曆) 40년[1612년(광해군 4)]명 기와 등의 명문 기와가 출토되었다. 묘암명 기와를 통해 고려 시대 초기에 묘암사라는 사찰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부령명 기와 역시 고려 시대의 지명으로 조선 시대 이전부터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019년~2020년에 이루어진 추정 건물 대지B에 대한 시굴 조사에서는 유물 포함층과 기와 가마터 1기가 확인된 바 있다. 한편 성 외부인 울금 바위 서쪽에는 원효방(元曉房)이라 불리는 굴실이 있으며, 그 북쪽에도 베틀굴, 큰굴 등의 굴실이 두 곳 더 있다.

[의의와 평가]

지금까지 실시한 두 차례의 지표 조사와 8차에 걸친 시굴·발굴 조사에서는 백제 마지막 항전인 백강 전투와 관련된 문화층이나 유물이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 시대까지 산성이 운영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성벽과 고려 시대~조선 시대의 유구와 유물이 확인됨에 따라 고려 시대 이전 시기의 유구 존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전반적이고 체계적인 조사가 앞으로 더 진행된다면 백강 전투와 관련한 고고학적 단서가 나올 것이라 기대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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