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449
한자 柳川里土城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유천리 산39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강원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현 소재지 유천리 토성 -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유천리 산39지도보기
성격 토성
양식 테뫼식 산성
크기(높이,길이,둘레) 798.9m[내성 둘레]|647m[외성 둘레]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유천리에 있는 삼국 시대 또는 고려 시대의 토성.

[개설]

유천리 토성(柳川里土城)은 사적 제69호인 부안 유천리 요지(扶安柳川里窯址)에 자리하고 있으며, 부안 청자 박물관 동쪽의 유천마을 버스 정류장 남쪽에 있는 토성이다. 토성의 평면 형태는 동-서 방향의 장방형이며, 남서쪽 모서리 부분에는 남쪽으로 이어지다가 동쪽으로 꺾이는 외성(外城)이 있다. 유천리 토성왜구의 침범이 잦았던 고려 시대 말경 수군의 근거지 또는 보안현(保安縣)의 방어 기지로 이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건립 경위]

유천리 토성이 자리하고 있는 옛 보안현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백제의 흔량매현(欣良買縣)이다. 신라에서 희안(喜安)으로 고치고 고부(古阜)에 속하게 하였다. 고려(高麗)에서 보안(保安)으로 바꾸었다[百濟 欣良買縣, 新羅改喜安 屬古阜, 高麗改保安]”고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백제 때 흔량매현이었다가 통일 신라 때에는 희안현(喜安縣)으로 개명하고 고부군(古阜郡)에 속하였다. 그리고 『문헌비고(文獻備考)』에 “보안현은 고부에 속하였다가 후에 나누어 부령현 감무가 [겸임하였으며] 신우 때에 보안현 [감무를] 두었다[保安縣 入古阜 後析爲扶寜縣監務 辛禑置保安縣]”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고려 말 우왕(禑王) 때 보안현에 감무를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천리 토성은 이때 축성되었거나 개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위치]

유천리 토성부안군 보안면 유천리 유천마을 입구 맞은편에 있다. 부안군 보안면 소재지인 영전 사거리에서 곰소 방면[국도 제30호선]으로 1.1㎞ 정도 가다 보면 유천마을 입구 버스 정류장이 나오며, 이곳을 지나면 부안 청자 박물관이 위치하고 있다. 유천 버스 정류장 남쪽 도로변을 따라 동쪽 방향으로 경사진 높은 지대가 보이는데, 이곳이 유천리 토성의 북벽에 해당한다. 토성을 포함한 이 일원에 부안 유천리 요지의 제2구역, 제3구역, 제4구역이 자리하고 있으며, 현재 구릉의 대부분은 밭과 논으로 개간하여 경작하고 있는 상태이다.

[형태]

테뫼식 산성으로, 내성(內城)의 평면 형태는 동-서로 긴 장방형에 가깝다. 둘레는 798.9m이다. 외성은 꺾쇠형의 선형으로 길이는 647m이며, 내성과 외성을 합친 길이는 1,445.9m이다.

[현황]

『고적 조사 자료』에 “토축이며 연장은 약 770간, 높이는 12척이다[土築延長 約770間 高12尺]”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토축 연장이란 뜻은 내성인 토축과 외성인 연장을 포함한 규모로 판단된다. 1간은 미터[m]로 환산하면 약 1.82m이므로 성의 둘레는 약 1,401.4m이다. 1960년대 조사자인 교수 전영래의 실측 결과인 1,445.9m와 문헌 기록이 비슷하다. 내성은 약간 높은 북쪽 성벽을 배후로 삼아 좌우의 능선을 따라 토루(土壘)를 쌓았고, 남쪽 성벽 중앙의 수구(水口)를 향해 마주쳤는데, 남쪽 성벽에는 공호(空濠)를 설치하였다.

서쪽 성벽의 토루는 밑변 너비가 12.5m, 상면 너비가 2m, 성내 수직 높이가 2m, 성외 수직 높이가 3m로 성 바깥쪽이 1m가량 낮다. 서쪽 성벽의 남쪽에는 길이 28.5m, 너비 19m 내외의 우루대지(隅樓坮地)가 있다. 성문은 북쪽 성벽의 가운데 부분에서 북문 터가 확인된다. 내성의 규모는 각각 북쪽 성벽이 231.2m, 동쪽 성벽이 145m, 서쪽 성벽이 129.2m, 남쪽 성벽이 293.5m로 전체 길이는 798.9m이다. 평면 형태는 사다리꼴에 가까운 장방형이다. 외성은 내성의 남서 모서리에서 남으로 273m 정도 뻗었다가 다시 남동 방향으로 374m 정도 뻗어 전체 길이는 647m이다. 외성의 끝에는 당시 포구가 있어서 교통로의 기능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유천리 토성보안현을 두었던 고려 말 왜구의 침략으로부터 안위를 지키기 위해 축성되었을 가능성은 물론이거니와, 이곳이 백제 흔량매현의 땅이었던 점으로 보아 삼국 시대에 축성되었을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다. 유천리 토성의 외성은 당시 포구와 연결되는 교통로의 기능도 고려되며, 내성의 남문으로 들어서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일종의 옹성(甕城)과 같은 기능도 겸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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