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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335
한자 歷史
영어공식명칭 Histor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병남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의 선사 시대부터 현대까지의 역사.

[선사와 고대]

부안은 산·바다·평야가 한데 어우러진 지리와 자연환경으로 인하여 선사 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하였다. 동진면반곡리 토성 부근에서 채집된 구석기 편은 동진강 주변에 이미 구석기 시대부터 역사·문화가 전개되었음을 보여 준다. 청동기 시대 유적으로는 격하 패총[조개더미]과 함께 변산면 마포리, 보안면 신복리, 계화면 일대에서도 패총이 조사되었고, 남방식 29기, 개석식 51기 정도의 고인돌이 파악되었다. 또한 보안면 하입석리줄포면 신리, 행안면 역리에서는 송국리형 주거지 유적이 나왔다.

2~3세기 사이 소규모 정치체의 주거지로 보안면 부곡리줄포면장동리신리, 백산면 용계리백산성 등이 조사되었고, 보안면부곡리, 하입석리, 줄포면장동리, 대동리, 신리에서는 주구묘가 나왔는데 이는 마한이 이 지역의 중심을 이루던 3세기 전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유적과 기록들을 함께 보면, 부안 지역은 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마한의 하나인 지반국(支半國)으로 존속하였고, 4세기에는 백제의 영역이 남하하면서 편입되었다. 변산면 격포리에 있는 부안 죽막동 유적[사적 제541호]을 통해 백제 시대 부안 지역이 중국과 교류를 하는 중요 창구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백제 부흥 운동 시기에는 주류성이 부흥 운동의 중심지이자 ‘부흥 백제국’의 수도 역할을 하였다.

[고려 시대]

고려 시대 부안은 부령현(扶寧縣)보안현(保安縣)으로 나뉜다. 부령현은 지금의 부안군 북부인 부안읍, 동진면, 계화면, 행안면, 하서면, 상서면 동북부와 주산면 지역이고, 보안현은 지금의 부안군 남부, 곧 보안면줄포면, 진서면, 변산면, 상서면 서남부 등 변산 일대였다.

고려 시대 많은 인물이 부안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였다. 그중 이규보(李奎報)[1168~1241]는 부안의 풍경을 중국 『한서(漢書)』에 나오는 동해 가운데에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에 비견할 정도로 훌륭하다고 표현하였다. 또 “변산은 예부터 천부라 일컫는데[邊山自古稱天府], 좋은 재목 가리어 동량으로 쓰리라[好揀長村備棟欀]”라는 시를 남겨 부안을 나라의 재목창(材木倉)으로 표현하였다. ‘천부’란 ‘천부지토(天府之土)’의 준말로 흙이 매우 기름져서 갖가지 산물이 많이 나는 땅을 일컫는다.

더불어 고려 시대 부안과 관련하여 가장 주목되는 부분이 청자의 생산이다. 부안은 전라남도 강진과 함께 고려청자의 본산지였다. 부안에서 생산한 고려청자는 왕실과 귀족, 관료 집단과 사찰 등에서 주로 사용하였다. 부안 지역의 가마터에서는 각종 용문 청자 편과 용문이 시문된 대형 매병 등이 나왔는데, 용은 왕을 상징하므로 왕실 청자가 부안 지역에서 제작되었음을 증명해 준다. 이는 곧 부안 청자의 도자사적 위상이 왕실에서 귀족, 관료의 수요와 직결되는 최고 수준이었음을 보여 준다.

[조선 시대]

조선이 건국한 후인 1414년(태종 14) 12월 부령현보안현을 합쳐 부안현으로 하였다. 조선 후기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동도면, 상동면, 염소면, 서도면, 하서면, 우산내면, 상서면, 남상면, 남하면, 하동면, 소산면, 입상면, 입하면, 건선면, 좌산내면, 이도면, 일도면 등 17면이 보이고, 1789년(정조 13) 간행된 『호구 총수(戶口總數)』에는 용연면이 추가되어 18개 면이 보인다.

조선 시대의 도로인 역로와 관련하여 부안은 앵곡도(鶯谷道)[완주군 이서면 은교리]에 속하였다. 또 교통과 관련하여 조선 전기의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부안에 동진원(東津院)수세원(手洗院), 금설원(金設院) 등이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조선 시대 중요한 통신 수단인 봉수(烽燧)가 월고리, 점방산, 계화도, 위도의 4곳에 있다고 언급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조선 전기 부안의 인구는 323호, 1,662명으로, 이는 가구당 평균 5.1명이다. 『여지도서』에는 6,625호, 3만 3876명[남 1만 4599명/여 1만 9277명]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여자가 훨씬 많다. 『호구 총수』에는 7,923호, 3만 8,448명[남 1만 9090명/여 1만 9358명]으로 가구당 평균 4.8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나온다. 『호구 총수』에는 남녀의 성비가 거의 일대일로 균형이 잡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부안현의 특산물로 조기와 오징어, 청어 등과 같은 해산물이 집중적으로 기재되었다. 이 외에도 송이버섯과 모시, 자기도 보인다. 또한 사슴도 특산품이었음이 확인된다. 조선 후기의 상황을 반영하는 『여지도서』의 물산(物産)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비교했을 때 삼과 송이, 자기만 빠졌을 뿐 나머지는 거의 비슷하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부안의 경작지가 7,140결이라고 나온다. 그중 논이 절반을 넘었다. 또 밭농사도 상당하여 오곡[쌀·보리·조·콩·기장]과 삼, 모시, 닥나무 등이 토산품이었다. 한편, 조선 후기가 되면 논농사의 비율이 급증하는데, 『여지도서』에는 한전(旱田)[밭]이 1,533결(結) 1부(負) 4속(束)이고, 수전(水田)[논]이 3,014결 84부 1속으로 밭농사와 논농사의 비율이 1 대 2가 되었다.

더불어 부안은 갯벌이 넓고 많아 각종 수산 자원이 풍부하여 예부터 수산업이 농업 다음가는 산업이었다. 부안의 수산물을 정리하면, 어류로는 상어·조기·오징어·청어·은어·홍어·준치·웅어·붕어·숭어·갈치, 패류로는 새우·게, 갑각류로는 조개·굴, 해조류로는 김·다시마 등이 있었다. 또 위도에는 어량소(魚梁所)가 2개 있었는데 주로 청어가 많이 잡혔다. 1511년(중종 6) 4월 기록에는 위도에 청어가 많이 나서 논밭과 생업이 없는 자는 어살을 치고 여기에 종사하여, 많을 때는 15곳이 넘었으며 이득도 다른 곳의 두 배가 될 정도로 풍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조선 후기인 17~18세기에 발생한 천재지변은 농업을 주로 하던 생활상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당시 가장 심각한 사회 문제는 기근이었다. 이에 천혜 조건을 갖춘 부안 지역 중에서도 변산은 도적떼로 표현된 유리걸식한 백성들의 마지막 도망처 구실을 하고 말았다. 변산은 농사를 지을 만한 너른 들판과 낮은 구릉이 있고 물고기를 잡아먹을 수 있는 강과 얕은 바다가 있으며, 관군 등을 피해 달아나거나 숨을 수 있는 험준한 산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부안은 동학과도 인연을 맺어, 기행현(奇幸鉉)이 쓴 『홍재일기(鴻齋日記)』에 따르면 1894년(고종 31) 4월 4일 김낙철이 이끄는 동학군 1만여 명이 부안읍에 입성하였다고 나온다. 『홍재일기』에는 부안 현감의 도피와 동학군의 동헌 장악 등 부안읍성 함락 과정이 적혀 있다. 기행현은 그때의 곤란한 상황은 형용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불빛이 하늘을 가리며 총 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고 적었다.

[일제 강점기]

1914년 4월 1일 지방 관제가 개정되어 군에 대한 통폐합이 이루어지면서 부안군도 이전의 19개 면에서 10개 면으로 축소되고 91개 법정리로 편제되었다. 『부안군 군세 일반』에 따르면 당시 전체 가구는 1만 7000, 인구는 8만 6000명 정도이다. 일본인의 주 거주지는 부령면과 줄포면, 백산면인데 부안읍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주로 관료이거나 상업 활동을 하였고, 줄포면백산면은 항구를 중심으로 한 미곡 수탈과 관련이 있다.

1930년대 부안 지역에 살던 사람들의 직업을 보면 농림 목축업[76%], 상업·교통업[4%]과 함께 적은 숫자지만 무직자도 조사되었다. 농지 소유 비율은 지주[1%], 자작[2%], 자작 겸 소작[14%], 소작[83%]으로 농민 대부분은 소작인이었다. 주요 공업은 정미소[20개소], 주조장[14개소], 누룩 공장[1개소]으로, 생산액은 정미업이 229만 2053원, 양조업 8만 8560원, 누룩 공장 1만 900원이었다. 당시 부안군 줄포면은 호남 지방의 산물을 실어 나르는 수탈 거점으로 경찰서와 도정 공장을 위시해서 조선식산은행 줄포출장소를 비롯하여 통운 창고, 농산물 검사소, 어업 조합 등이 있었고, 항구에는 하루에도 수백 척씩 배가 드나들었다.

부안객사는 1926년에 헐리고 그 자리에 부안군청이 들어섰고, 수령이 살던 곳은 일본인이 신사(神社)를 세웠다. 경찰서 앞에는 관야병원[후에 봉래병원으로 바뀜]이 있었고, 경찰서 바로 옆 옛 공공 도서관 자리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고급 요정 ‘미루모야’와 술집 ‘모리’가 있었다. 이 앞으로 인력거집이 하나 있고, 그 옆으로 안전자동차 차부와 우편소가 있었다. 본정통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던 상점들이 즐비하였다. 제일 큰 상점이 요시오카[吉岡] 상점이 들어섰고, 본정통이 끝나는 남문 거리 근처에는 유일한 극장인 소화극장(昭和劇場)이 세워졌다.

일제 강점기 부안 지역에서 몇 명이나 징용과 징병으로 끌려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2012년 부안군청에서 조사한 「부안 태평양 전쟁 피해자 명단」에는 1,335명의 이름이 올라가 있다. 이 명단은 군인과 군무원, 노무자, 정신대 등으로 구분하였는데, 징용으로 끌려간 노무자가 가장 많았고, 그다음은 군무원과 군인 순이다.

[광복 전후]

태평양전쟁이 본격화하면서 1943년부터 일본은 미군이 부안의 해안 쪽으로 상륙할 것을 예상하고 관동군 1개 연대를 주둔시켰다. 군인들은 부안초등학교에 주둔하고 부안읍의 신씨 선산에 일본 군인이 사용할 말들을 수용하였으며 곰소 쪽에 대대를 두었다. 미군 상륙 작전이 이루어질 지역으로 판단한 변산 쪽에는 호도 많이 팠으며, 군인들은 실전 훈련도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군인들은 무겁고 무표정한 얼굴로 부안초등학교의 길쭉한 복도에 모여들었다. 라디오를 중간에 두고 양쪽으로 네 줄로 도열하여 열심히 방송을 듣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다음 날인 8월 16일에는 부안초등학교에서 일본기가 내려졌고, 어른들은 광복이 되었다며 “평난이 되었다.”고 기뻐하였다.

광복이 되었지만 부안의 일본군은 치안을 위해 총칼로 무장한 채 부안 시내를 순찰하였다. 이들은 거의 한 달여를 일본인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순찰을 하였는데 이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대항할 만한 무기가 없어 바라만 볼 뿐이었다. 이 때문인지 부안에서는 광복 후에 일본인의 피해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처음으로 우리말과 역사를 배웠다. 당시를 증언한 사람들은, 처음에는 일본말이 아닌 우리말이 어색하였다고 전하기도 하였다. 부안초등학교는 일본군이 철수한 후에야 교과 과정을 진행할 수 있었다.

[현대]

1962년 11월 21일 그동안 전라남도 영광군의 관할이었던 위도면이 부안군에 편입되었다. 한편, 부안을 대표하던 줄포항 대신에 곰소항, 격포항이 새로운 항구로 부각하였다. 줄포항은 계속해서 유입되는 토사로 항구의 구실을 잃어 가다가 1966~1967년께 폐쇄되고 말았다.

1970년대에는 전국에서 야산 개발 사업이 진행되었는데, 부안도 그동안 야산으로 남아 있던 지역이 이즈음 농경지로 전환되었다. 또한 대규모 간척 사업으로 우리나라 지도를 다시 작성해야만 할 정도였는데, 이때 섬이었던 계화도(界火島) 지역에 대규모 간척지를 조성하여 넓은 지역이 육지화되었다.

1980년대 이후에는 부안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지역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또한 1978년 완공된 동진대교에 이어 1991년 착공하여 2001년 완공한 서해안 고속 도로가 부안을 통과하면서 지역의 교통난 해소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그리고 1990년 2월 착공하여 1996년 12월 부안 다목적댐이 건설되었다.

한편 1993년 10월 10일 일요일 오전 10시 10분쯤 부안 위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서해 훼리호 참사는 큰 충격이었다. 이 사건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보다 안전 의식의 결여였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다. 과거의 교훈을 그대로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반복되는 일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하여야만 똑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부안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 중 하나가 부안에 핵 폐기장을 설치하는 문제로 주민들이 반대와 찬성으로 갈려 대립한 사건이다. 2003년 7월 12일 오전 9시 30분 부안 군수가 핵 폐기장 유치 선언을 함으로써 촉발된 사태는 이후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의 대립 속에서 지속적인 반대 시위로 결국 2004년 9월 16일 백지화되었다. 이 기간 동안 찬반 시위는 300회 이상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45명이 구속되었고 126명은 불구속, 95명은 즉심에 넘겨졌으며 126명은 불입건되었다. 주민 241명, 경찰 214명이 부상을 당하였고, 지역 주민 50% 이상이 다양한 형태의 직간접적인 피해를 보았다. 핵 폐기장을 둘러싼 해묵은 갈등에서 벗어나 부안 사람들은 모두 결국 하나의 공동 운명체라는 것을 확인하고자 2018년 12월 4일 부안 평화의 소녀상 추진위원회를 발족하여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고, 82개 단체, 1,381명의 개인과 익명의 후원자가 동참하여 8021만 2130원을 모았다. 그리하여 2019년 4월 13일 부안군청 앞 소공원에서 부안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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