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668
한자 崔順煥
영어공식명칭 Choe Sunhwan
이칭/별칭 최순환(崔舜煥),경산(耕山)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당상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재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11년 9월 9일연표보기 - 최순환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28년 3월 - 최순환 부안공립보통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28년 - 최순환 서울 중동학교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33년 3월 5일 - 최순환 위친계를 농민 조합으로 변경
활동 시기/일시 1933년 4월 - 최순환 검거
활동 시기/일시 1933년 12월 - 최순환 2차 검거
활동 시기/일시 1936년 11월 - 최순환 간이 학교 개교
몰년 시기/일시 1950년 7월 19일연표보기 - 최순환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10년 3월 1일연표보기 - 최순환 건국 포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2011년 7월 16일 - 최순환 61주기 추도식
추모 시기/일시 2012년 9월 8일 - 최순환 묘비 제막식
출생지 부안군 -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당상안길 14[당상리 466번지]지도보기
거주|이주지 부안군 -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당상안길 14[당상리 466번지]지도보기
학교|수학지 부안공립보통학교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부풍로 29[동중리 173-3번지]지도보기
학교|수학지 서울 중동학교 -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로8길 37[일원동 692번지]
활동지 당상리 저축 조합 -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당상리지도보기
묘소 최순환 묘 -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당상리 산66-1번지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사회 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당오초등학교 당북분교 후원 회장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부안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사회 운동가.

[개설]

최순환(崔順煥)[1911~1950]은 동진면 당상리에 있는 위친계를 농민 조합으로 바꾸어 농민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징역 2년, 집행 유예 5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자라나는 세대의 교육에도 관심이 커서 문중 재각인 모성재에서 간이 학교를 열어 후진 교육에 앞장섰다. 광복 후 당오초등학교 설립 후원 회장을 맡아 힘쓰다가 6·25 전쟁 때 경찰에게 피살되었다.

[가계]

본관은 탐진(耽津)이고, 초명은 순환(舜煥), 호는 경산(耕山)이다. 아버지 최상진(崔相晉), 어머니 신영우(申英雨) 사이에서 3남 5녀 중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최순환은 지금의 부안군 동진면 당상안길 14[당상리 466번지]에서 태어났다. 1928년 서울 중동학교[현 중동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그 해에 자퇴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대가족의 호주 대리 역을 맡아 매갈잇간[방앗간]을 운영하던 최순환은 김한룡(金漢龍), 최옥환(崔玉煥), 박병권(朴炳權) 등과 사회주의 서적 및 사회 비판적인 신문 기사와 잡지 등을 탐독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최순환 등은 빈부 격차가 없는 공평한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농민들을 조직할 필요가 있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1933년 3월쯤 최순환 등은 당상마을 주민 40여 명이 부모가 사망할 때 서로 돕기 위해 조직한 위친계(爲親契)를 ‘농민 조합’으로 변경하였고, 이후 ‘당상리 저축 조합’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최순환은 당상리 저축 조합의 서기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었고,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집행 유예 5년을 언도받고 약 1년간 옥고를 치렀다.

교육에 관심이 컸던 최순환은 당북 간이 학교 인가를 얻고, 문중 재각인 모성재[부안군 동진면 당상리]에서 개교를 하도록 후원 회장을 맡았다. 간이 학교에서는 여성들에게도 교육의 기회를 열어 주었다.

1945년 광복 이후 최순환은 동진면 농민위원회에 명의만 걸어 놓고 별 활동은 하지 않았으나 정부는 국민 보도 연맹원에 그의 이름을 끼워 넣었다. 당시 최순환의 관심은 온통 자라나는 어린이들의 교육 환경 개선에 있었다. 마을의 아이들이 멀리 떨어진 동진면까지 걸어서 학교에 다니는 것을 안타까워하여 당오초등학교[현재 폐교] 설립 후원 회장을 맡아 신축 자금을 기부 받기 위하여 동네마다 돌아다니며 열성을 다하였다. 하지만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교육에 대한 그의 열정은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1950년 7월 부안 경찰들은 후퇴하면서 보도 연맹에 가입된 부안 사람들을 세 차례에 걸쳐 사살하였는데, 논에서 일을 하다 잡혀 간 최순환 역시 영문도 모른 채 줄포의 40고라당[현 부안군 줄포면 후촌 인근 골짜기]에서 죽음을 맞았다. 최순환이 40세 되던 해였다. 당시 당오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던 김위현은 “최순환은 나라에 대한 애국정신이 투철한 분이었다. 그런 분이 억울하게 죽다니 말도 아니다.”라고 증언하였다.

[묘소]

최순환의 묘는 부안군 동진면 당상리 산 66-1번지[문래 당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2010년 3월 1일 건국 포장이 추서되었다. 2012년 9월 8일 ‘최순환 묘비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참고문헌]
  • 『전북 국민보도연맹 사건 진실 규명 결정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9)
  • 공훈전자사료관(https://e-gonghun.mpva.go.kr)
  • 독립유공자경산최순환지사기념사업회(https://cafe.naver.com/montmartre)
  • 부안이야기(http://www.buan21.com)
  • 인터뷰(최순환의 자녀 최기숙, 1935년생, 2019.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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