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546
한자 內基里扶安金氏所藏古文書
이칭/별칭 내기리 부안 김씨 가 고문서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문헌/문서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내기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집필자 류호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소장처 내기리 부안 김씨 소장 고문서 -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내기리지도보기
성격 고문서
관련 인물 김방제|김홍제|김헌제|김우인|김필상|김두상|김석상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내기리 부안 김씨 문중에 소장되어 있는 고문서.

[개설]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내기리에 살았던 부안 김씨(扶安金氏) 가문에서 남긴 고문서들의 대부분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생산된 문서들이다. 작성 당시에는 상동면 상리로 불리었던 지역이며, 우반동부안 김씨와는 뿌리를 같이하기는 하지만 지역적으로는 조금 떨어져 있다. 내기리 부안 김씨 소장 고문서(內基里扶安金氏所藏古文書)는 거의 100건에 이르고 있는데, 이 중 상당수는 간찰로 60건이나 된다. 이밖에 호적류 21건, 교지류 7건, 상서(上書), 원정(原情) 등 소지류 5건, 완문(完文) 2건, 입안(立案) 1건 등을 포함하고 있다. ‘내기리 부안 김씨 가 고문서’라고도 부른다.

내기리 부안 김씨 소장 고문서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부안 석동의 선산을 둘러싸고 전주 최씨(全州崔氏)와의 사이에서 오랫동안 벌어진 산송(山訟) 관련 문서들이다. 소지(所志)와 상서, 원정, 완문, 입안 등 8건의 문서들은 전주 최씨 가문의 유절재 소장 고문서(留節齋所藏古文書)들을 보완해 주는 성격을 갖는 문서들이어서, 두 문중의 산송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해 준다. 한편, 호적 문서는 1867년에서 1904년까지 작성된 것들로, 호구 단자와 준호구, 호적표를 망라하고 있다. 부안 김씨 가의 호주로 가장 윗대가 되는 인물은 김홍제(金弘濟)로, 그는 1882년(고종 19)의 증광 문과에 71세의 나이로 급제하였다.

[구성/내용]

내기리 부안 김씨 소장 고문서 중에서 호남권한국학자료센터의 DB로 구축된 고문서는 모두 43건으로, 이곳에 탑재된 고문서들을 중심으로 주요 고문서들의 내용을 옮겨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1872년 김방제(金邦濟) 상서(上書)

1872년(고종 9)에 김방제 등이 전라감사에게 올린 상서이다. 자신들의 산송 중 송가(松價)를 징납하는 일에 관한 것이다. 김방제 등이 베어낸 소나무는 경신년[1860년] 12월의 한성부 관문에 따라 묘문과 묘 주위를 관청에서 개척한 것이다. 또 신유년[1861년] 2월에 전주 최씨와의 격쟁으로 조사관이 친심(親審)하여 적간(摘奸)한 소나무는 1,779주인데, 최광권(崔光權) 등이 허무맹랑하게 1만 주라고 하여 문제를 일으킨 것이라고 하였다. 조사관의 공안이 분명하고 부안현에 신유년의 적간 문서가 있으니 이를 참고하여 넘치게 징수당하지 않도록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전라감사는 송가를 징봉할 때 조사하여 바로잡을 것이라고 하였다.

2. 1874년 김홍제(金弘濟) 등 원정(原情)

1874년(고종 11) 2월에 부안에 사는 김홍제 등 부안 김씨 29명이 연명하여 암행어사에게 올린 원정이다. 김홍제 등은 부안현 하동면 석동산 산지를 둘러싸고 전주 최씨와 오랫동안 산송을 벌여왔다. 이 소지에서는 석동산에서 소나무를 베어낸 일과 전주 최씨 가문에서 자신들을 모욕한 죄 등 여러 가지 사안을 해결해 주기를 탄원하였다. 이에 암행어사는 ‘한성부와 감영에서 이미 처결한 일이다’라는 제사(題辭)[관부의 판결]를 내렸다.

3. 1860년 전라감영(全羅監營) 입안(立案)

1860년(철종 11) 12월에 부안현 하동면 석동산에 있는 산지를 둘러싼 김방제 등 부안 김씨의 산지에 대한 전라감사의 입안이다. 부안에 사는 김방제는 소윤의 본손인데, 소윤묘의 산지와 송추(松楸)[산소 둘레에 심는 나무로, 주로 소나무와 가래나무를 심음]를 외손인 최가에게 뺏기게 되었다. 이에 한성부와 전라감영에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석동산에 차장(借葬)한 최씨의 무덤은 원래 2총뿐이었는데 후에 소윤묘 용미(龍尾) 근처에 6총, 섬돌 밑에 1총을 장사지냈다. 전라감영의 지시로 산지를 친심하여 최씨가 외선조(外先祖)의 산소를 강제로 빼앗았다고 판결하고, 최민 4명을 엄히 다스릴 것과 소윤의 묘문을 즉시 개척할 것과 무덤의 4표를 정하고, 4표 안의 송추는 김민의 것임을 확인하는 입안이다. 입안 뒤에는 부안현감의 서목이 점련(粘連)되어 있다.

4. 1860년 전라감영(全羅監營) 완문(完文)

1860년(철종 11) 12월에 부안현 하동면 석동산에 있는 산지에 대하여 제기한 김방제 등 부안 김씨의 소송에 대해서 전라감사가 승소 판결을 내리고 이를 증빙하는 입안이다. 김방제는 소윤묘가 있는 석동산 근처의 산지와 송추를 외손인 최가에게 뺏기게 되었다. 이에 한성부와 전라감영에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이에 전라감영의 지시로 산지를 친심하여 최씨가 외선조의 산소를 강제로 빼앗았다고 판결하고, 최민 4명을 엄히 다스릴 것과 소윤의 묘문을 즉시 개척할 것과 무덤의 4표를 정하고, 4표 안의 송추는 부안 김씨의 것임을 확인해 주었다.

5. 1882년 김헌제(金櫶濟) 시권(試券)

1882년(고종 19) 10월 20일에 김헌제가 고종이 친림한 춘당대(春塘臺) 전시(殿試)에 제출했던 시권이다. 이번 과거는 왕세자의 입학·관례·가례를 축하하기 위한 증광시(增廣試)였다. 김헌제는 삼하(三下)의 성적을 받고, 총 61명 중 31위에 해당하는 병과 21위에 급제하였다. 김헌제의 초명이 김홍제이다.

6. 1882년 임오경과문무과방목(壬午慶科文武科榜目)

1882년 10월 20일에 시행된 임오경과증광시(壬午慶科增廣試)에 급제한 사람들의 명부이다. 이번 과거는 왕세자의 입학과 관례 및 가례를 축하하기 위해 설행한 시험이다. 이때 문과는 61명이, 무과는 23명이 급제하였다. 현재 부안 김씨 가에서 임오경과문무과방목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과거에 김헌제[김홍제]가 병과 21위로 급제하였기 때문이다. 을사오적으로 잘 알려진 이완용(李完用)은 병과 18위로 급제하였다.

7. 모년 부령 김씨(扶寧金氏) 회인공파(懷仁公派) 팔고조도(八高祖圖)

부령 김씨 회인공파의 팔고조도로 작성 연대는 알 수 없다. 회인공파는 부안 김씨 소윤공파 48세손인 생원 김익손(金益孫)이 분리된 분파로 당시에는 진사공파가 되었는데, 김익손의 손자인 직장(直長) 김철(金鐵) 대에 다시 나뉜 분파이다. 팔고조도 맨 앞에 있는 김철은 임진왜란 당시에 아들 김수인(金守仁)과 함께 왜적들에 맞서 싸운 인물이다.

[의의와 평가]

내기리 부안 김씨 소장 고문서우반동의 고문서와 함께 부안 지역에 세거하였던 부안 김씨의 역사를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들이다. 뿐만 아니라 이곳의 전주 최씨들과 오랫동안에 걸쳐 벌어진 산송 관련 문서들도 포함하고 있어서 전주 최씨 가문의 유절재 소장 고문서들을 보완하는 성격도 지니고 있다.

[참고문헌]
  • 호남권한국학자료센터(http://hnkostma.org/emuseum/serv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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