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392
한자 西海-號慘事
영어공식명칭 West Sea Ferry Disaster
이칭/별칭 서해 훼리호 침몰 사고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재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93년 10월 10일연표보기 - 서해 훼리호 참사, 서해 훼리호 침몰
전개 시기/일시 1993년 10월 27일 - 서해 훼리호 참사, 서해 훼리호 인양
종결 시기/일시 1993년 11월 2일연표보기 - 서해 훼리호 참사 마지막 실종자 인양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5년 10월 10일 - 서해 훼리호 위령탑 제막식 및 제2회 추도회
발생|시작 장소 사고 발생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 임수도지도보기
종결 장소 군산 공설 운동장 - 전라북도 군산시 사정동 159
성격 사고

[정의]

1993년 10월 10일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 앞바다에서 발생한 여객선 서해 훼리호 침몰 사고.

[개설]

서해 훼리호 참사 는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에서 362명을 태운 여객선 서해 훼리호가 침몰하여 292명의 사망자를 낸 사건이다. 희생자들은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 주민과 주말을 이용해 바다낚시를 즐기러 온 낚시꾼들이었고, 구명조끼 등을 제대로 입지 못해 희생자가 크게 늘어났다. 사고 후 언론에서는 ‘일어나서는 안 될 후진국형 인재’로 규정했다.

[사고 원인]

출항 당시 기상은 북서풍이 초당 10m~14m, 파고 2m~3m로 좋지 않았다. 폭풍주의보 등의 기상 특보가 내려지지는 않았지만 여객선이 출항하기에는 악천후였다. 기상 특보가 내려지면 항구별 어선 신고소에서 선박들의 입출항을 통제하지만, 사고 당일처럼 기상 특보 기준을 초과하지 않으면 선박 관계자들이 자체적으로 판단해서 운항을 결정한다. 항해 안전 운행 지침은 파고 2.5m, 바람 속도 10m 이상일 때는 여객선의 운항을 금지하고 있지만, 선장이 안전하다고 판단할 때는 운항이 가능한 것으로 정하고 있었다. 당시 기상 상황을 고려했을 때 출항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선장은 출항 결정을 내리고 출발 예정 시간인 9시에서 40분인 지난 9시 40분에 무리하게 출항을 강행하였다.

[경과]

1993년 10월 10일 위도를 떠나 격포항으로 향하던 서해훼리 소속 110톤급 여객선 서해 훼리호가 침몰했다. 출항 당시의 서해 훼리호는 정원 초과 상태로 운항했다. 221명 정원에 승객 355명, 선원 7명 등 362명이 탑승해 정원보다 141명을 더 태웠다. 배의 앞부분에는 짐이 가득 실려 있었다. 15리터짜리 새우 액젓 600여 통과 낚시 도구, 자갈 7.3톤 등 화물도 규정을 어겨가며 실은 상태였다. 배의 무게 중심보다 위쪽에 물건이 실리면서 평형 상태를 회복하는 복원력이 약해졌다. 출항 당시 기상은 북서풍이 초당 10m~14m, 파고 2m~3m로 여객선이 출항해서는 안 되는 악천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출항하였다.

오전 9시 50분께 해면에 떠 있던 그물이 왼쪽 스크루에 걸렸고, 다시 오른쪽에도 그물이 걸렸다. 속도가 크게 줄어든 상황에서 파도가 배를 쳤다. 과적으로 배의 복원력이 크게 줄어든 상황에서 결국 서해 훼리호는 오른쪽으로 전복됐다. 서해 훼리호는 구명보트와 구명조끼 등을 형식적으로는 안전 규정에 맞게 갖추고 있었지만, 사고가 발생하자 구명보트[12명 정원]는 한 대만이 제대로 작동했다. 승객들은 아이스박스 등을 붙잡고 구조를 기다렸다.

정부는 사고 당일인 10월 10일, 교통부 장관을 본부장으로 하는 사고 수습 대책 본부를 구성하고 내무부, 국방부, 교통부 장관과 해운항만청장, 해양경찰청장 등을 현지에 급파했다. 또 사고 해역에서는 경찰 헬기 19대, 해경 함정 16척, 육군 헬기 12대, 해군 고속정 6척, 해군 함정 20척, 민간인 어선 30척이 출동해 구조 활동을 벌였다.

사고 초기에는 몇 명이나 탔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관련 법규에 따르면 선박은 출항 전에 여객의 이름, 주민 등록 번호, 주소 등을 적은 승객 명부를 작성해 1부를 매표소에 보관해야 한다. 그러나 서해 훼리호는 군산해운항만청에 승객자 수만 무전으로 보고하고 승선자 명단은 바로 보고하지 않고 한 달에 한번 꼴로 사후 보고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결과]

292명의 목숨을 앗아간 서해 훼리호는 침몰 17일 만인 1993년 10월 27일에 곳곳이 부서지고 긁혀서 짓이겨진 모습으로 최종 인양되었다. 서해 훼리호 침몰 사고의 마지막 실종자의 주검은 11월 2일 오후 5시 10분께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 임수도 부근 해상에서 부안군청 소속 어업 지도선이 발견했다. 이로써 희생자 292명의 주검을 모두 거두게 되었다. 서해 훼리호 침몰 사고가 난 지 23일 만에 희생자 주검을 모두 인양한 것이었고, 군과 경찰, 위도 주민들, 그리고 대대적인 표류 사체 수색 작업에 나선 어민과 공무원들의 끈질긴 노력의 결과였다.

[의의와 평가]

사고 선박은 승객들이 작성해 내는 승선 신고서를 부두에서 미리 받아 보관하지 않고, 배 안에서 승무원이 승객들의 명단을 파악해 여객 명부를 작성했다. 승객 명부가 없으니 사고가 발생해도 승선 인원조차 밝혀내지 못했다. 대형 해난 사고 뒤에는 다시는 재발하지 않도록 문제점을 밝히고 철저한 후속 조치가 필요했다. 해상 교통 체계의 허점과 같은 구조적 문제에 대한 분석이나 대안 제시에 따라 철저한 개혁이 필요했다. 그러나 극히 미진했다. 안전 불감증과 과거 역사를 기억하지 않고 경시하는 문화 속에서 불행은 싹튼다. 21년이 흐른 뒤 그렇게 싹튼 불행이 세월호 사건으로 이어져 꽃다운 아이들을 바다에 수장시키며 우리를 더욱 슬프게 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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