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391
한자 登龍里-鬪爭
영어공식명칭 Cattle Droving Struggle of Deungyong-ri
이칭/별칭 부안 소몰이 싸움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하서면 장신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재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85년 8월 24일연표보기 - 부안 등용리 소몰이 투쟁 시작
종결 시기/일시 1985년 9월연표보기 - 부안 등용리 소몰이 투쟁 종결
발생|시작 장소 등용성당 - 전라북도 부안군 하서면 등용길 13[장신리 59-3]지도보기
종결 장소 한국 기독교 회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로 19[연지동 136-46]
성격 사건
관련 인물/단체 박배진|김인술|서석기

[정의]

1985년 전라북도 부안군 하서면 장신리 등용에서 소값 피해 보상을 요구하며 벌인 농민 투쟁.

[개설]

1978년 ‘수입 자유화 기본 방침’이 확정되었고, 1980년대 들어서는 수입 개방 농정으로 350여 종의 농축산물이 국내에 수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1980년부터 1984년까지 육우 17만여 마리, 젖소 3만 5000마리, 소고기 2억 7000여만 근이 수입되어 소값이 폭락하였다. 120여 만 호의 소 사육 농가들이 큰 피해를 보았고, 농민들은 소값 피해 보상 요구 및 농축산물 수입 개방 저지 투쟁을 시작하였다.

농수산물 수입 개방 저지 투쟁은 1985년 7월 1일 경상남도 고성 농민들의 시위를 필두로 해서 ‘소몰이 투쟁’이라 불린 농민 생존권 투쟁으로 확대되며 광범하게 전개되었다. ‘소몰이 투쟁’에는 7월~8월 사이에 전국 20여 개 시군에서 총 2만여 명의 농민들이 참여하였다. 전라북도 부안군의 하서면 등용리에서도 농민들을 주축으로 하는 소몰이 투쟁이 시작되었다. 소몰이 투쟁은 초기에는 소값 피해 보상과 농축산물 수입 중지를 내건 생존권 확보 차원의 성격을 띠었으나, 투쟁이 고조되면서 군사 독재 반대라는 정치 민주화 운동의 성격을 보이기도 했다.

[역사적 배경]

정부는 1970년대 후반부터 비교 우위론을 내세우며 개방 농정을 폈다. 곡물과 외국 농축산물이 수입되면서,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어 이농하는 농민들이 속출했다. 1981년에는 뉴질랜드와 캐나다에서 값싼 소를 수입해 농민들에게 팔며 소 키우기를 장려했다. 농민들은 빚을 내어 소를 사서 키웠지만 소가 너무 많아지며 소값이 반값으로 떨어졌다. 정권과 결탁한 사람들은 외국에서 소고기까지 수입했고, 소값은 더욱 하락하여 소 키우는 농민들의 경제는 파탄이 났다. 이에 큰 피해를 본 120여 만 호의 소 사육 농가 농민들이 소값 피해 보상 요구 및 농축산물 수입 개방 저지 투쟁을 시작했고, 1985년에는 전국적인 투쟁으로 확대되며 ‘소몰이 투쟁’이라 불리게 되었다.

[경과]

1985년 8월 24일에 전라북도 부안군 하서면 등용리[현 장신리] 일대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농민들이 깃발을 앞세우고 구호를 외치며 속속 모여들었고, 천주교 부안본당의 서석기 신부도 함께 했다. 각 면에서 모여든 300여 명의 전라북도 부안 지역 농민들은 등용리 공소 앞동산에서 소값 피해 보상 요구 대회를 시작했다. 깃발에는 “수입 장관 수출하자”, “농산물 가격 보장하라”, “토지는 농민에게”, “부안 농민이여, 궐기하자” 등이 쓰여 있었다. 농민들은 소를 앞세우고 등용리 공소 입구까지 나가 경찰과 대치하다가 공소 마당까지 밀렸다. 경찰은 공소 마당까지 들어와 농민들을 강경 진압하며 많은 사람에게 부상을 입혔고, 19명을 연행해갔다.

박배진과 김인술이 공소 앞마당에서 3일을 농성한 후 지명 수배되며 서울로 피신했고, 부안 농민 대표 15명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인권위원회에서 부안 농민들의 소값 피해 보상 요구 대회의 경과 보고를 하였다. 9월 25일에는 23개 민주화 운동 단체들이 ‘소값 피해 보상 및 농축산물 수입 반대 농민 투쟁 진상 보고 대회’를 열고 외국 농축산물 수입 중단과 소값 피해 보상을 요구하고 나섰다. 전라북도 부안 농민들이 농성을 계속하여 부안 농민들의 소몰이 싸움과 농촌의 현실을 전국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결과]

전국의 소몰이 투쟁 중에서도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곳이 전라북도 부안이었다. 1986년 3월, 정부는 소몰이 투쟁을 계기로 농가 부담 경감 조치가 포함된 농어촌 종합 대책을 발표했다. 농가 부담 경감 조치에는 1983년~1984년 소 입식 자금의 분할 상환, 소 입식 자금, 주택 개량 자금, 영농 영어 자금의 금리 인하 등의 부채 경감 대책이 포함되었다. 당시 소몰이 투쟁은 가톨릭농민회[가농]나 기독교농민회[기농] 등 종교 단체의 이름을 빌리는 형식으로 행사를 열었다. 그러나 1986년부터 종교 단체의 이름을 빌리지 않고도 행사를 열 수 있는 자주적인 농민 조직들이 군 단위에서 조직되기 시작했고, 1987년 2월에는 전국농민협의회의 창립으로 이어졌다.

[의의와 평가]

1985년의 소몰이 투쟁은 농촌의 현실과 농민이 처한 문제의 심각성을 전 국민에게 구체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집권 세력은 소몰이 투쟁이 격렬해지자 정권에 대한 투쟁으로 인식하고 위기의식을 가지고 강력하게 대처하였다. 전라북도 부안에서 벌어진 등용리 소몰이 투쟁은 벼랑으로 내몰린 농민들이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절박함을 인식하고, 농민 자신의 생존권은 농민 스스로가 지켜야 한다는 인식을 고양하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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