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나로드 운동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381
한자 -運動
영어공식명칭 V Narod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혜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32년연표보기 - 브나로드 운동 시작
종결 시기/일시 1934년연표보기 - 브나로드 운동 종결
발생|시작 장소 브나로드 운동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지도보기|하서면지도보기|동진면지도보기
성격 사건|농촌 계몽 운동
관련 인물/단체 동아일보사|학생 계몽대|학생 강연대|학생 기자대|김형원|김백술|신석춘|차종성

[정의]

1930년대 초 전라북도 부안군 지역에서 이루어진 농촌 계몽 운동.

[개설]

‘브 나로드(v narod)’란 러시아 말로 ‘민중 속으로’라는 뜻이다. 브나로드 운동은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젊은 지식인층이 농민 공동체를 기반으로 사회주의의 실현이 가능하다는 신념 아래, 농민의 계몽을 위해 벌였던 운동이었다. 1873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농민을 대상으로 급진적 혁명 사상을 통한 계몽과 선전 활동을 벌이기 위해 농촌으로 들어가면서 정점을 이루었다. 그러나 농민들로부터 별 호응을 얻지 못하고, 주동자들이 체포되며 막을 내렸다.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농촌을 대상으로 한 사회주의적 급진 사상 전파의 시발점이 되며 많은 혁명가를 양성하게 되었고, 주변 여러 나라에서 농촌 계몽 활동이 시작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1931년 우리나라에서도 농촌 계몽 운동의 차원에서 문맹 퇴치를 목적으로 브나로드 운동을 전개하였다. 동아일보사가 중심이 되어 전개했고, 많은 학생들이 참여하여 많은 효과를 거두었다. 1933년 이후로는 계몽 운동으로 개칭하면서 폭넓게 지속되어 나갔으나, 1935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명령으로 중단되었다.

[역사적 배경]

우리나라에서 브나로드 운동은 1931년부터 1934년까지 동아일보사 주최로 전개되었다. 브나로드는 ‘민중 속으로’라는 뜻의 러시아어로, 민중을 깨우쳐야 한다는 취지로 제정 러시아 말기에 지식인들이 만든 구호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어의(語意)만 따서 한글 보급을 통한 문맹 타파 및 위생 지식 보급 운동으로 전개하였다. 당시 브나로드 운동을 통한 계몽 활동은 학생 계몽대, 학생 강연대, 학생 기자대 등 3대(隊)로 나눠 진행되었다. 학생 계몽대는 고등 보통학교 4학년과 5학년으로 구성되었으며 한글과 초보적인 수학 강습을 담당하였다. 학생 강연대는 전문학교생으로 구성되어 위생이나 학술과 관련된 강연을 담당하였다. 학생 기자대는 활동 내용을 동아일보사에 보고하며 주최 측과 연락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경과]

전라북도 부안군 지역의 브나로드 운동으로는 1932년 하서면의 브나로드 운동이 처음으로 신문에 소개되었고, 7월 24일부터 8월 10일까지 18일간 강습이 진행되었다. 수강생은 시작일에는 남녀 60명이었다가, 종료일에는 55명[남 51명, 여 4명]으로 조금 줄어들었다. 강습이 끝난 후에도 계속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김형원(金馨元), 김백술(金栢述)이 계속해서 야학을 이어갔다.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면[현 부안읍]에서도 같은 해 8월 7일부터 브나로드 운동이 시작되었다. 수강생의 편의를 위해 주·야 2부로 나누어 진행되었고, 강습 시간은 오전 9시~12시, 오후 8시 30분~10시 30분이었다. 학과목은 한글, 산술, 창가, 동화 등이었고, 참가 인원은 남녀 62명[남 23명, 여 39명]이었다. 강습 기간은 10일 정도로 단기간이었는데, 학생들의 개학일이 임박하여 기간 연장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에서도 같은 해 8월 10일에 브나로드 운동이 시작되어 8월 24일 종료되었다. 학과목은 숫자, 한글, 체조 등이었고, 강습생은 남자만 39명이었다. 책임 대원은 신석춘(辛錫椿)이었고, 직원은 차종성(車琮性)이었다. 마을 유지들이 적극적인 후원이 있었고, 강습 기간을 연장해달라는 요구도 있었으나 학생들의 개학일 때문에 뒷날로 미루어야 했다.

[결과]

전라북도 부안 지역의 브나로드 운동에 대한 기사는 1934년에도 두 건이 보도되었으나, 모두 시행되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일제 당국이 볼 때 브나로드 운동은 단순한 한글 학습을 넘어 당면 사회 문제들에 관한 다양한 의견 교환과 강연을 통해 우리의 민족의식을 높여 가는 위험한 일이었다. 주최 측에서는 일제가 브나로드 운동을 금지할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 ‘글과 셈 이외에는 아무 것도 혼합하지 말 것’을 강조하였다. 일제도 처음에는 브나로드 운동 자체를 금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를 핑계로 방해를 하다가, 결국 금지 조치를 내리며 중단시켰다. 1934년 전라북도 부안군 산내면 진서리[현 진서면 진서리]에서는 교재까지 모두 준비하고도 일제의 방해로 결국 진행하지 못하게 되기도 했다.

[의의와 평가]

브나로드 운동 은 주최 측에서는 단순한 계몽 활동을 원하고 시작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참여 학생들에게는 농민들의 항일 의식 고취에 열성을 보일 수 있도록 하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여, 이후의 전라북도 부안 지역 농민 운동에도 많은 영향을 주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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