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367
한자 淸燈戰鬪
영어공식명칭 Battle of Cheongdeung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선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597년연표보기 - 청등 전투 시작
종결 시기/일시 1597년연표보기 - 청등 전투 종결
발생|시작 장소 청등 고개 -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지도보기
성격 사건
관련 인물/단체 이유|유의방

[정의]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청등 고개에서 벌어진 조선 의병과 일본군의 전투.

[개설]

청등 전투 는 일본이 1597년 전라도를 점령하기 위해 일으킨 정유재란 당시 이유(李瑜), 유의방(柳希芳) 등이 이끄는 의병이 전라북도 부안의 청등 고개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운 전투이다.

[역사적 배경]

1592년(선조 25) 4월에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거침없이 북진하여 2개월여 만에 서울과 평양을 함락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침략에 비껴나 있던 호남·호서 지방에서 조직한 의병의 항전과 이순신(李舜臣)[1545~1598]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활약으로 일본군의 군수 물자 보급이 막히게 되면서 전쟁은 소강상태에 빠졌다. 명나라의 참전으로 진행되던 강화 협상이 결렬된 1597년에 일본은 조선을 다시 침략했고, 의병 활동이 활발하고 조선군에 군량미 등의 군수 물자를 보급하는 전라도로 주력 부대를 보내 공격하도록 했다.

일본이 재침하기 전에 조선 조정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1537~1598]의 호남 침공을 예견하지 못하고 전라도의 병력과 물자를 경상도 지역으로 이동 배치한 상태였다. 전라도의 방어력이 현저하게 약화된 상황 속에서, 일본군의 선봉 부대가 8월 16일에 남원성(南原城)을 함락하고 19일에는 전주를 점령하였다. 남원·전주의 함락과 함께 전라도 지역의 군사 방어 체계가 무너지기 시작하며 부안을 비롯한 전라도 전역이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갈 참이었다. 이때 부안 상서면청등 고개에서는 일본군의 침입에 맞서는 청등 전투가 벌어졌다.

[경과]

청등 고개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소재지 돼지터에서 국도 제23호선호벌치 쪽 약 500m 지점에 위치해 있다. 호벌치를 넘고 청등 고개를 넘으면 부안 읍내까지 평평한 들길이어서 부안 읍내를 방어하는 마지막 방어의 요충지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흥덕의 채홍국 등이 조직한 남당창의군(南塘倡義軍)이 호벌치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일본군이 부안으로 몰려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청등 고개에서 10여 리[약 4㎞] 정도 떨어진 도화실[도화동(桃花洞)]에 살던 함풍 이씨(咸豊李氏) 이유가 앉아서 일본군을 맞이할 수 없다면서 주변 고을에 격문을 보내고, 자질(子姪), 제자, 노복(奴僕) 등을 이끌고 선봉에 서서 일본군과 3일 동안 접전하였다.

일본군은 이유가 이끄는 의병의 기세에 밀려 30리[약 12㎞] 밖까지 패퇴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원군도 없고 화살도 떨어진 상황에서 일본군이 다시 쳐들어와 벌어진 전투에서 이유가 총탄을 맞고 순절하였다. 부인 부안 김씨(扶安金氏)이유의 순절 소식을 듣고 원수를 갚는다며 칼과 대창을 들고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싸우다가 죽었다고 한다. 이후에 사람들이 일본군을 물리쳤다 하여 이곳을 ‘퇴왜치(退倭峙)’라 불렀고, 이유의 충절을 잊지 않기 위해 타루비(墮淚碑)를 세웠다.

[결과]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군이 철수하기 시작했고, 조선군은 명군과 함께 육상에서 일본군을 추격했으나 섬멸하지는 못하였다. 같은 해 11월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진린(陳璘)이 지휘하는 명 수군과 함께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자 노량(露梁)에서 일본 전선 300여 척과 해전을 벌였다. 그 결과 조선군과 명군이 일본 함선을 200여 척이나 격침하며 최종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순신은 전사하고 말았다. 노량해전을 마지막으로 일본과의 7년에 걸친 전쟁은 끝나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청등 전투 에 앞서 일어난 호벌치 전투는, 채홍국이 기술한 『야수실기(野叟實記)』에 의하면 1597년 4월 4일부터 4월 23일 사이에 일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때는 일본군의 재침 이전 시점이었기 때문에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선조실록』에는 1597년 10월 초에 부안, 변산, 무장, 영광 등지에 일본군이 침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청등 전투는 남원과 전주가 함락된 이후인 1597년 9월 20일 전후에 전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라북도 부안에서 벌어진 청등 전투는 전력(戰力)의 부족으로 일본군을 격퇴하지는 못했지만 당시 부안 지역의 사족, 양민, 승려 등이 온 힘을 결집하여 일본군에 대항한 항쟁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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