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366
한자 胡伐峙戰鬪
영어공식명칭 Battle of Hobeolchi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상서면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선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597년연표보기 - 호벌치 전투 시작
종결 시기/일시 1597년연표보기 - 호벌치 전투 종결
발생|시작 장소 호벌치 전투 -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지도보기|상서면지도보기
성격 사건
관련 인물/단체 채홍국|김영년

[정의]

1597년 정유재란 때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보안면의 경계인 호벌치에서 벌어진 조선 의병과 일본군의 전투.

[개설]

호벌치 전투 는 1597년 일본이 전라도를 점령하기 위해 일으킨 정유재란 때 채홍국(蔡弘國) 등이 이끄는 의병이 전라북도 부안의 호벌치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운 전투이다.

[역사적 배경]

1592년(선조 25) 4월에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거침없이 북진하여 2개월여 만에 서울과 평양을 함락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침략에 비껴나 있던 호남·호서 지방에서 조직한 의병의 항전과 이순신(李舜臣)[1545~1598]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활약으로 일본군의 군수 물자 보급이 막히게 되면서 전쟁은 소강상태에 빠졌다. 명나라의 참전으로 진행되던 강화 협상이 결렬된 1597년에 일본은 조선을 다시 침략했고, 의병 활동이 활발하고 조선군에 군량미 등의 군수 물자를 보급하는 전라도로 주력 부대를 보내 공격하도록 했다.

일본이 재침하기 전에 조선 조정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1537~1598]의 호남 침공을 예견하지 못하고 전라도의 병력과 물자를 경상도 지역으로 이동 배치한 상태였다. 전라도의 방어력이 현저하게 약화된 상황 속에서, 일본군의 선봉 부대가 8월 16일에 남원성(南原城)을 함락하고 19일에는 전주를 점령하였다. 남원·전주의 함락과 함께 전라도 지역의 군사 방어 체계가 무너지기 시작하며 부안을 비롯한 전라도 전역이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갈 참이었다. 이때 부안 상서면·보안면호벌치 고개에서는 일본군의 침입에 맞서는 호벌치(胡伐峙) 전투가 벌어졌다. 호벌치는 현재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에서 줄포로 가는 국도 제23호선 12㎞ 지점에 해당하는 해발 약 50m의 낮은 산마루 고개다.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보안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요지로서, 남쪽에서 부안으로 들어오려면 반드시 이 재를 넘어야 한다.

[경과]

1592년에도 창의(倡義)한 바 있던 채홍국 등은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고창(高敞)의 남당에서 다시 창의하였다. 당시 의병진에 참여한 사람은 채홍국을 비롯해 박이점(朴爾點), 한계상(韓繼常), 송수익(宋受益), 송수명(宋受命), 정만(鄭慢), 채홍주(蔡弘周), 김안국(金安國), 강혹성(姜或成), 채치정(蔡致貞), 곽방욱(郭邦郁), 장돈(張墩), 채이달(蔡以達), 문익빈(文益斌), 박경득(朴慶得), 이세번(李世蕃), 이영발(李英發), 이야(李埜)[본명 가녕(可寧)], 성래길(成來吉), 최봉언(崔鳳彦), 안지환(安知煥), 남유진(南有津), 곽재상(郭載祥), 채성장(蔡成章), 경시우(景時禹), 엄능간(嚴能幹), 승만세(承萬世), 채충량(蔡忠良), 민우적(閔佑適), 만일사(萬日寺) 주지승(住持僧) 각심(覺心), 만일사 승(僧), 각수암(覺羞庵) 승 보규(普規), 선불암(仙佛庵) 세존승(世尊僧) 관심(觀心), 대암승(大庵僧) 윤심(允心) 등이었다.

부안 관내에 거주하던 사족들과 승려들까지 연합한 의병대가 조직되어 침입하는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채홍국이 기술한 『야수실기(野叟實記)』에 의하면, 호벌치 전투는 1597년 4월 4일부터 4월 23일 사이에 일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때는 일본군이 재침하기 이전 시점이었기 때문에 사실로 보기 어려운 면이 있다. 『선조실록(宣祖實錄)』에서는 1597년 10월 초에 부안, 변산, 무장, 영광 등지에 왜군이 침입한 것으로 확인된다. 따라서 당시 호벌치 전투는 1597년 9월 하순에서 10월 초순 사이에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결과]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군은 마침내 철수하기 시작했고, 조선군은 명군과 함께 육상에서 일본군을 추격했으나 섬멸하지는 못했다. 같은 해 11월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진린(陳璘)이 지휘하는 명 수군과 함께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자 노량(露梁)에서 일본 전선 300여 척과 해전을 벌였다. 그 결과 조선군과 명군이 일본 함선을 200여 척이나 격침하며 최종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순신은 전사하였다. 노량해전을 마지막으로 일본과의 7년에 걸친 전쟁이 끝나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전라북도 부안에서 벌어진 호벌치 전투는 일본군을 격퇴하지는 못했지만, 부안 지역의 사족, 양민, 승려 등이 온 힘을 결집하여 일본군에 대항한 항쟁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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