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2년 지방지도』「부안 위도진 지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275
한자 1872年地方地圖扶安蝟島鎭地圖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유물/서화류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한상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작 시기/일시 1872년 - 『1872년 지방지도』 제작
현 소장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신림동 산56-1]
성격 고지도
소유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관리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정의]

1872년 조선 정부에서 제작한 전국 지방 지도 중 부안 위도진 지도.

[개설]

19세기 후반 조선은 정치·경제·사회적 혼란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이에 국내적으로 정치·경제·사회를 바로잡고, 대외적으로는 서양 세력을 물리치기 위한 군비의 정비가 필요하였고,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1872년 지방지도』「부안 위도진 지도(扶安蝟島鎭地圖)」가 제작되었다. 위도(蝟島)는 『문헌비고(文獻備考)』에 의하면 1682년(숙종 8)에 처음으로 위도진을 두어 첨사(僉使)라는 종3품직의 무관을 두었음을 알 수 있으며, 1683년에는 위도의 가리포에 수군 진영을 설치하여 고군산, 우포, 다경포, 법성포, 금모포, 군산포, 지도 등이 위도에 속했다고 하였다. 이것은 전라우수영의 관할 구역이 너무 광대하므로 두 개로 나누어서 그 하나의 진관(鎭管)을 위도의 가리포에 새로이 두어서 옛날의 도만호(都萬戶)처럼 첨사와 만호진(萬戶鎭)을 관할케 하였던 것이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위도진 첨사(蝟島鎭僉使), 군관 십삼(軍官十三), 진리 십오(鎭吏十五), 지인 팔(知引八), 사령 십(使令十), 우수영속(右水營屬)”이라 하여 그 정원을 밝혔는데, 종3품의 무관직인 첨사 아래에 53명의 인원이 딸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으로 보아 당시의 위도진은 다른 진영보다 그 규모가 컸으며 또한 맡은 책임도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형태 및 구성]

『1872년 지방지도』는 채색 필사본 낱장 지도로 총 459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략 전지 크기로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1872년 지방지도』「부안 위도진 지도(扶安蝟島鎭地圖)」도 채색 필사본이며, 상단에는 진(鎭)에 대한 설명문이 수록되어 있고, 중앙에는 지리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 부안현(扶安縣) 전체 지도에서 진(鎭) 부분을 더욱 확대하여 상세히 그려 놓았다.

[특징]

『1872년 지방지도』「부안 위도진 지도」 에는 위도진의 모습과 현황에 대한 정보를 상세히 담고 있어 위도진에 파견된 순검사(巡檢使)는 물론 중앙 조정에서도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지도를 보면 객사(客舍)를 중심으로 창고(倉庫), 아사(衙舍), 교청(校廳), 사령청(使令廳), 이청(吏聽) 등이 설치되어 있었고, 요망대(瞭望臺)의 모습도 보인다. 부안 위도진은 해방(海防)을 위한 시설로, 물길과 조수 간만(潮水干滿)에 대한 정보도 기록되어 있으며, 전선(戰船), 병선(兵船), 사후선(伺候船)의 모습도 그려 놓고 있다. 또한 주위 산천(山川), 도로(道路), 지명(地名), 형세(形勢)를 상세히 그리고 있어 군사적 상황 발생 시 즉시 작전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의의와 평가]

국내는 물론 대외적으로 군비(軍備)를 정비하고 체계적인 관리를 위해 제작된 『1872년 지방지도』「부안 위도진 지도」는 당시 조선 정부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으며, 위도진의 현황을 상세히 살펴볼 수 있는 역사적 사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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