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186
한자 上旺嶝里
영어공식명칭 Sangwangdeung-ri
이칭/별칭 웃왕등,상왕등도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 상왕등리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진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연표보기 - 전라남도 영광군 위도면 상왕등리 개설
변천 시기/일시 1963년연표보기 - 전라남도 영광군 위도면 상왕등리에서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 상왕등리로 개편
성격 법정리
면적 0.44㎢
가구수 31가구
인구[남/여] 44명[남 27명/여 17명]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상왕등리(上旺嶝里)왕등도의 위쪽에 있어 웃왕등 또는 상왕등도라고 이름하였다.

[형성 및 변천]

상왕등리하왕등리와 함께 ‘왕등도’라 하여 조선 시대에는 부안현(扶安縣)에 속하였다. 1896년(고종 33) 전라도가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로 개편될 때 전라남도 지도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북암, 모괴도, 열도를 병합하여 전라남도 영광군의 위도면 상왕등리로 개설하였다. 1963년 위도면이 부안군에 편입되어 부안군 위도면 상왕등리가 되었다.

상왕등리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300년쯤 전 이곳으로 유배 온 노씨(盧氏), 남씨(南氏) 성을 가진 사람들이 처음 살기 시작하였다는 것만 마을 사람들의 증언으로 알 수 있다.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1622~1673]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전국 지리지인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에 “왕등도-위도 서쪽에 있으며, 물길로 100리 떨어져 있는 작은 섬으로, 사람이 살지 않는다. 사면이 모두 절벽으로 되어 배가 정박할 수 없는 곳이며, 섬 가운데 닥나무·등나무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왕등도 사람들이 증언한 정착 연대와 대체로 맞아떨어진다.

[자연환경]

상왕등도, 모괴도, 열도, 북암 등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이 섬들 중에 사람이 사는 섬은 상왕등도 하나이다. 지역 주민들은 상왕등도를 웃왕등 혹은 상도, 하왕등도를 아래왕등 혹은 하도라고 부른다. 섬의 높이로는 상왕등도가 해발 240m로 높고, 면적은 하왕등도가 더 넓다. 상왕등도위도로부터 약 19㎞ 떨어져 있으며, 2㎞가량 바닷길을 끼고 하왕등도와 마주한다.

최고 지점은 160m로 섬 전체가 하나의 산을 이루며, 섬의 남동쪽에 일부 낮은 평지가 있다. 북서쪽 해안은 파도의 영향이 강하여 해식애가 발달하였다. 상왕등도는 부안군에 속하는 서해상에서 가장 먼 곳에 위치한다. 마을 뒤편에는 제일 비경인 용문암이 있다. 물이 빠지는 간조 때에는 바위에 홍합, 거북손, 고둥 등이 많이 붙어 있다. 상왕등도는 전복의 보고였으며, 키조개, 해삼, 홍합 등이 많이 생산되었으나 이제는 오염되어 예전만 못하고 홍합만 여전히 잘 자란다.

용문암 정상부는 억새밭으로, 멀리서 보면 민둥산처럼 보이지만 닥나무와 누리장나무가 숲을 이룬다. 예전에는 나무를 땔감으로 쓰면서 풀과 나무를 채취하여 섬 전체가 민둥산이었다고 한다. 남벌이 극심하여 산이 황폐화되자 1966년 산림법이 강화되었고, 이후 나무 대신 화석 연료로 바뀌면서 상왕등도 역시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서서히 제 모습을 찾았다고 한다.

[현황]

상왕등리위도면의 북서부에 있다. 면적은 0.44㎢이며, 이 중 밭이 0.09㎢, 임야 0.32㎢ 등이다. 해안선 길이는 4㎞이다. 2020년 12월 31일 현재 상왕등도리의 행정리에 31가구, 44명[남 27명/여 17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상왕등리에 속한 상왕등도는 부안군의 가장 서쪽에 있는 섬으로 우리나라 영해를 구획하는 최외측 도서이다. 서해안은 직선 기선에 의해 영해를 정하므로 상왕등도의 역할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상왕등도는 섬이 워낙 작고 교통이 불편하여 낚시꾼들 외에는 찾는 사람이 드물다. 주민들은 대부분 어업에 종사하며, 마을 주변에서 약초를 재배하기도 한다. 변산면 격포리 격포항에서 출발하는 정기 여객선이 위도를 경유하여 운항한다.

상왕등도하왕등도에 비해 마을 규모도 크고 마을 회관, 발전소, 선착장 등의 시설이 비교적 잘되어 있다.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한 서해의 특수성 때문에 선착장의 형편이 썩 좋지 않다. 온통 바위로만 이루어진 섬이라 논은 전혀 없고 밭이라고는 텃밭 정도이다. 최근에 방파제가 보강되어 주민들과 외지 배들의 긴급 피난처가 되고 있다. 방파제는 전기 시설과 함께 상왕등도 주민들의 숙원 사업이었으며, 현재는 배가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게 되었다. 방파제 공사를 하면서 물양장 시설도 함께해서 선착장 부근 일대를 넓혔다. 이 넓어진 공간에는 현대식 어촌계 건물이 들어서며 마을의 짜임새가 좋아졌다.

평지가 거의 없다 보니 동쪽 언덕 비탈의 샘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집들이 앉아 있다. 이 샘은 바위틈에서 솟는 석간수로 수량이 풍부해 식수, 생활용수로 쓰고도 남는다. 마을 뒤 언덕에는 2006년 준공한 한국전력 건물이 들어서 있다.

상왕등도항은 2012년 8월 22일 국가 관리 연안항[국가 안보 또는 영해 관리에 중요하거나 기상 악화 등 유사시 선박의 대피를 주목적으로 하는 항만]으로 지정되었다.

1908년(순종 2) 간재(艮齋) 전우(田愚)는 “공자는 춘추 전국 시대의 어지러운 세상에서 ‘도(道)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 들어가겠다.’라고 하였으니 나도 바다로 가겠다.” 하고 망국의 한을 품은 채 상왕등도로 숨어 버렸다. 그러나 제자들이 왕래하기에는 너무 멀고 험한 절해의 고도라 3년 만에 계화도로 옮겨 192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10년 동안 수천 명의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전념하였다. 상왕등도리 입구 언덕에 ‘간재 선생 유허비’가 있고,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샘에서 오른쪽으로 구멍가게 뒤편에 전우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강학소 터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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