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창에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1283
한자 海倉-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형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958년 9월 3일 - 박영근 출생
편찬|간행 시기/일시 2002년 - 「해창에서」 『저 꽃이 불편하다』에 수록
저자 몰년 시기/일시 2006년 5월 11일 - 박영근 사망
배경 지역 해창(海倉) -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해창지도보기
성격 현대시
작가 박영근

[정의]

2001년 박영근이 전라북도 부안 지역에 있는 해창 갯벌에 대하여 쓴 현대 시.

[개설]

「해창(海倉)에서」는 부안 출신의 시인 박영근변산 지역의 해창 갯벌을 주제로 쓴 현대 시로 2001년 『현대문학』 6월호에 발표하였으며, 2002년 창작과비평사에서 발간한 시집 『저 꽃이 불편하다』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이다. 해창부안읍에서 서쪽으로 18㎞ 떨어져 있는 지점으로, 세미 등 이 지역에서 거둔 각종 특산물을 보관해 두는 창고가 있었던 장소이다. 내변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며, 새만금 간척 사업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세운 75기의 장승과 함께 매향비가 서 있는 곳이다.

[구성]

2002년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한 박영근의 시집 『저 꽃이 불편하다』는 총 2부로 나뉘어 있고, 「해창에서」는 그중 제1부에 수록되어 있다. 1980년대 노동 운동의 전위에 섰던 박영근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이다.

[내용]

시집 『취업공고판 앞에서』, 『대열』, 『김미순 전(傳)』 등을 통해 한국 노동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보인 ‘노동자 시인’ 박영근은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그가 젊음을 다 바친 노동 현장은 자본주의 문화에 허망하게 무너지고 만다.

그는 일찍이 전주고등학교 1학년을 채 마치지 않고 작파한 뒤, 공장들이 밀집되어 있는 서울 영등포 둑방촌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가 1977년이었다. 그리고 이후로 예의 그 영등포 둑방촌과, 새만금 간척 사업의 방조제 공사가 시작되는 고향인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해창마을을 걸어 다녔다.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바닷가 갯막을 걸었고, 바닷길을 달려 연평도로 가서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중계하는 TV를 켜두고 울었다. 돌아보면 그는 늘 신산하고 눅눅한 생의 한가운데를 걸었던 것이다.

거기에 늘 어스름 찬바람이 일던 어업조합 창고가 있었다.

거기에

칠산바다 참조기 궤짝이 밤새워 전깃불 아래 쌓이던

부둣머리 선창이 있었다.

거기에 갯물에 쩔어버린 삭신이 조생이 한 자루로 뻘밭을 밀고 가던

홀몸 조개미 아짐

읍내 닷새장 막차를 기다리던 늙은 감나무가 있었고

흉어철이 들수록 밤이면 혼자서 가락이 높던 갈매기 집이 있었다.

-박영근, 「해창에서」 부분

시인이 그의 고향인 변산면 해창에 내려와 빈 갯벌을 걷고 있을 때는 이미 해창의 풍요는 사라지고 없었다. 칠산도에서 잡아오는 만선의 조기는 전설이 된 지 오래고, 참조기 궤짝을 쌓아놓고, 물메기국에 깡소주를 마시던 그 시절을 그리워해야 했던 것이다. 어업 조합 창고며, 홀몸 조개미 아짐이 읍내 오일장 막차를 기다리던 늙은 감나무며, 흉어 철이면 더 크게 울던 갈매기 집이 있었던 해창. 하지만 이백 년 동안 자리를 지키던 팽나무가 꺾이어 없어진 자리에 서서 시인은 ‘수십 킬로 뻘을 질러간다는 저 방조제의 끝이 어딘지를’ 묻지 않는다. 그 끝은 폐항이 되어 사라질 해창과 해창 갯벌, 그리고 바다가 주는 풍요로움의 마지막 저녁이 될 것이므로, 시인은 ‘빗속으로 물보라 엉키는 바닷가 철책을 지나/ 갯벌을 건너’ 다만 걸어 들어갈 뿐이었다.

바지락철이 오면 온 식구들이 갯벌에 나가 살았다

키꼴이 선 장정들은

소를 몰고 와 쟁기를 대고 갯고랑을 갈아엎고,

거기 가마니때기로 바지락이 쌓여갔다

저녁물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던 소 구루마의 어둑한 행렬 속에는

금성표 라디오의 이미자 노래가 있었다

수평선 자락에서부터 눈 시리게 출렁이던 물이랑을 지우고

물길을 끊어버린 방조제 공사장을 나는 바라본다

뻘길은 평지가 되고 한 도시가 들어서겠지

보상금에 조생이 자루를 놓아버린 조개미 아짐은 또 취했다 보다

다 떠나버린 마을길에서 해장술집을 찾는다

-박영근, 「해창에서2」 전문

해창박영근에게 있어 단순한 갯벌이 아니었다. 그곳은 바지락 철을 기다려 그의 온 식구들이 나가 생계를 이을 수 있었던 삶의 터전이었으며, 생명의 끈이었다. 시인의 집뿐만 아니라 일대가 다 그렇게 해창 바다에 기대어 연명하였다. 당시에는 소를 몰고 와 쟁기로 갯고랑을 파 바지락 가마니를 둘 정도로 해창 바다에서 나오는 것들은 엄청났다. 그렇게 저물녘이 되어서야 바지락 가마니를 떠메고 집으로 돌아가곤 했지만, 새만금이 들어설 방조제 공사장으로 인해 모두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려야 했던 시절이다. 이미 바지락이 덜 나오기 시작하면서 조개미 아짐은 술에 취해 살고, 사람들은 얼마 안 되는 보상금을 챙겨 마을을 떠났다. 박영근은 또 그렇게 ‘다 떠나버린 마을길에서’ 해장 술집이나 찾으며 얼마 안 있어 평지가 되고 도시가 들어설 뻘길을 걷고 또 걸었던 것이다.

[특징]

요즘 변산 일대는 시 「해창에서」처럼 찬바람이 일던 어업 조합 창고가 있는 곳이 아니다. 새만금 사업으로 엄청난 비전이 앞서는 개발 논리가 있고, 곳곳에 그럴듯한 펜션이며 음식점, 커피숍, 호텔과 콘도가 들어섰다. 어쩌면 이러한 변화를 두고 부안을 찾은 사람들은 ‘상전벽해’나 ‘천지개벽’이라는 말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딘지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칠산 바다 참조기 궤짝이 쌓인 선창이나 조생이 자루 밀고 가던 여인, 그 여인이 장에 가기 위해 기다리던 길가의 감나무와 어부들의 안식처인 갈매기 집처럼 정감이 가지 않는다. 그리고 노을과 뻘의 우주적 사랑이 깃든 갯벌처럼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거대한 뻘 속에서 숨을 쉬고 있는 수천수만의 생명을 저버리고 껍데기에 불과한 자본주의의 무덤 속에 스스로 갇혀버린 것이다. 박영근은 시 「해창에서」를 통해 노동자 시인답게 바로 그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박영근 시인은 등단한 이래 노동 현장과 노동자의 삶을, 그 속에서 존재하는 희망과 절망을 노래한 보기 드문 노동자 시인이다. 각박하고 절박한 시대 상황 속에서도 노동자의 서정성이 짙게 배어 있는 아름다운 노동 문학을 탄생시켰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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