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05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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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光山金氏 |
영어공식명칭 | Gwangsan Gimssi|Gwangsan Gim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원철 |
본관 | 광산 - 광주광역시 광산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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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지 | 광산 김씨 입향지 -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평교리![]() ![]() |
세거|집성지 | 광산 김씨 세거지 -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평교리![]() ![]() |
성씨 시조 | 김흥광(金興光) |
입향 시조 | 김주만(金冑萬)|김증여(金增汝)|김영환(金永煥)|김우보(金禹堡)|김창현(金昌鉉)|김우태(金遇泰)|김성발(金聖發)|김낙현(金樂鉉) |
김흥광을 시조로 하고, 김주만·김증여·김영환·김우보·김창현·김우태·김성발·김낙현을 입향조로 하는 전라북도 부안군의 세거 성씨.
광산 김씨(光山金氏) 시조는 김흥광(金興光)으로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의 셋째 아들이라고 전한다. 김흥광이 통일 신라 후기 나라에 난리가 날 것을 미리 알고 무진주 서일동[현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 평장리]으로 자리를 옮겨 학문을 닦으며 살았고, 그 후손들이 선조의 세거지인 광산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 왔다. 이후 이곳에서 평장사(平章事)가 많이 나 ‘평장동’이라고 불렀다.
광산 김씨는 조선조에 들어 많은 인물을 배출하여 명문가로 손꼽혔다. 특히 충청도 연산(連山)에 살았던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김장생의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은 부자가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그 후손 중에 뛰어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부안의 광산 김씨는 문숙공파(文肅公派) 김주정(金周鼎)의 후손이 많다. 김주정은 고려 원종(元宗) 때 명신(名臣)으로 지도첨의사(知都僉議事)를 지내고 원(元)과의 외교 등 국정에 공이 많았다. 몽고가 고려와 연합하여 일본을 정벌할 때 참전하였고, 사후 문숙(文肅) 시호를 받았다. 김주정의 13세손 세마(洗馬) 청헌(廳軒) 김주만(金冑萬)이 숙종(肅宗) 때 전라남도 장성에서 백산면 거마(巨麻)[현 부안군 백산면 평교리]에 들어와 살았다.
시중공파(侍中公派) 김증여(金增汝)는 전라남도 함평에서 부안으로 들어왔다. 김증여는 고려에서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김유(金流)의 후손이다.
녹사공파(綠事公派) 김영환(金永煥)은 고려 때 가안부 녹사(嘉安府綠事)를 지낸 김광로(金光輅)의 후손으로 부안에 입향하였다. 역시 녹사공파인 김우보(金禹堡)는 성종(成宗) 때 우의정(右議政)을 지낸 김국광(金國光)의 8세손으로 서울에서 부안으로 들어와 그 자손이 세거하고 있다.
김창현(金昌鉉)은 김장생의 후손으로 전라남도 장성에서 부안으로 들어와 살았다.
양간공파(良簡公派) 김우태(金遇泰)는 고려 후기 두문동(杜門洞) 72인의 한 사람인 김승길(金承吉)의 후예이며 사헌부 지평과 승문원 교리를 지낸 김석원(金錫元)의 5세손이다. 영조(英祖) 때 전라남도 함평에서 부안으로 들어왔고, 그 후손이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돌개]를 세거지로 하여 살고 있다.
김성발(金聖發)은 조선의 개국 공신(開國功臣)이었던 총제사(摠制使) 김계지(金繼志)의 후손으로 조선 후기 전라북도 정읍에서 부안으로 들어왔다.
삼사공파(三司公派) 김낙현(金樂鉉)은 조선 후기 전라남도 나주에서 부안으로 들어왔다.
2015년 인구 주택 총조사에 따르면 부안군에는 광산 김씨 1,855명이 살고 있다. 그러나 지역마다 입향조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같은 광산 김씨라도 서로 촌수가 멀다.
부안군 백산면 망산길 36-27[평교리 564번지]에 김주만을 배향한 첨소재가 있으며, 김주만의 묘가 부안군 백산면 평교리 560-1번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