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지 홍패」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543
한자 崔匡之紅牌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문헌/문서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석동길 68-9[연곡리 460]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류호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급 시기/일시 1389년 9월연표보기 - 「최광지 홍패」 발급
문화재 지정 일시 2020년 4월 23일연표보기 - 「최광지 홍패」 보물 제2062호 지정
소장처 유절암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석동길 68-9[연곡리 460]지도보기
성격 고문서
관련 인물 최광지(崔匡之)
용도 과거 합격 증서
발급자 국왕[공양왕]
수급자 최광지
문화재 지정 번호 보물 제2062호

[정의]

1389년 부안 출신의 최광지가 왕명으로 발급 받은 과거 합격 증서.

[개설]

최광지(崔匡之)는 전라도 부안 출신으로 본관은 전주이다. 최광지의 증조할아버지는 최용봉(崔龍鳳)이고, 할아버지는 최을인(崔乙仁), 아버지는 최담(崔霮)이다. 최담은 예부시에 급제한 뒤에 조선에서 집현전 제학(集賢殿提學)을 지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최담의 아들 최광지, 최직지, 최득지, 최덕지 등 네 명은 모두 예부시 또는 문과에 급제했다. 조선 초 부안의 유학자로 유명한 최생명(崔生明)이 바로 최광지의 아들이다. 1805년에 전주에서 간행한 『전주최씨족보』의 ‘최광지’ 항목에는 “생졸년과 관력은 상고할 수 없으나 홍패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라고 적혀 있었으나 실물은 찾을 수 없었는데, 전주 최씨 송애공파 종중의 재실인 유절암(留節庵)에서 조선 시대 고문서들과 함께 보관되어 있다가 2015년에 「최광지 홍패(崔匡之紅牌)」가 발견되었다.

2015년 우연히 유절암을 방문한 안승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장이 홍패의 존재를 확인했고, 이후 장서각 차원에서 본격적인 현지 조사에 나섰다. 그렇게 존재가 알려진 「최광지 홍패」는 2015년에 개최된 장서각 특별전[시권·試券 국가 경영의 지혜를 듣다]을 통해 일반에 공개되었다. 현재까지 고려 시대의 홍패로서는 일곱 번째로 발견되었으며,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2020년 4월 23일 보물 제2062호로 지정되었다. 문무과 과거 합격증을 홍패라 한 이유는 홍화씨 등으로 붉게 염색한 종이로 발급되었기 때문이다.

[제작 발급 경위]

「최광지 홍패」는 1389년(공양왕 1) 9월에 성균생원으로 조선의 문과에 해당하는 고려의 예부시에서 급제하여 국왕으로부터 발급 받은 과거 합격증이다.

[형태]

가로, 세로 각각 64㎝인 정사각형이다.

[구성/내용]

글씨는 세로쓰기[종서]로 3행이 적혀 있는데, 1행은 종이가 일부 찢겨져 보이지 않으나 복원해 보면 ‘왕지(王旨)[왕명]’로 추정되는 글자가 적혀 있고, 2행은 ‘성균생원 최광지 병과 제삼인 급제자(成均生員崔匡之丙科第三人及第者)’’, 3행은 ‘홍무 이십이 년 구월 일(洪武貳拾貳年玖月 日)’’로 적혀 있다. 그리고 3행의 발급 연월일 부위에 붉은색 인장이 찍혀 있는데, 그 인문은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이라고 되어 있다. 을과·병과·동진사 등으로 구분되는 고려 시대 문과 등제 구분 중 병과 3인은 전체 순위 6등에 해당되는 성적표이다. 고려국왕지인은 1368년에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세워진 이후 제1대 황제 홍무제(洪武帝)가 1370년(공민왕 19)에 공민왕에게 내려준 국새이다. 조선 건국 후인 1393년(태조 2) 명나라에 반납되었다. 조선 시대에 이 고려국왕지인이 찍힌 사례는 있으나, 고려 시대 공문서에 이 고려국왕지인이 찍힌 사례는 현재까지는 「최광지 홍패」가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의와 평가]

2020년 7월 현재까지 학계에 알려진 고려왕조의 홍패는 「장양수 홍패(張良守紅牌)」[1205], 「우탁 홍패(禹倬紅牌)」[1290], 「장계 홍패(張桂紅牌)」[1305], 「이자수 홍패(李子脩紅牌)」[1330], 「양이시 홍패(楊以時紅牌)」[1355], 「양수생 홍패(楊首生紅牌)」[1376] 등 모두 6점에 불과하다. 여기에 「최광지 홍패」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 「최광지 홍패」가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첫째, 다른 고려의 홍패들이 모두 왕명을 근거로 관사에서 발급한 문서였던 반면, 「최광지 홍패」는 왕명으로 발급된 홍패였다. 둘째, 문서에 찍힌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은 지금까지 확인된 고려 시대 문서 가운데 유일한 사례이다. 셋째, 고려 말의 홍패에도 왕지 양식이 적용되었다는 점에서 조선 시대 왕지 양식의 근원을 고려 말에서 찾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최광지 홍패」는 1276년(충렬왕 2)부터 과거 합격증에 ‘왕지(王旨)’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했다는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을 처음 확인시켜 주는 실물이자, 조선 시대 문서 제도와 관련성이 밀접하다는 점에서 역사적·학술적 가치 및 희소성이 인정되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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