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388
영어공식명칭 Partizan|North Korean Partisan
이칭/별칭 빨찌산,유격대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재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0년 9월 28일연표보기 - 변산 빨치산 활동
종결 시기/일시 1954년 여름연표보기 - 변산 빨치산 소멸
발생|시작 장소 변산 -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지도보기
종결 장소 변산 -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지도보기
성격 사건

[정의]

1950년 9·28 수복 이후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을 중심으로 활동한 좌익 세력의 유격대.

[개설]

빨치산 은 빨갱이로 통용되는 경우가 있으나 러시아어 파르티잔(partizan), 곧 노동자나 농민들로 조직된 비정규군을 일컫는 말로 유격대와 가까운 의미이다.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빨치산은 여수·순천 사건의 잔류 세력, 탄압을 받은 좌파 인사들, 6·25 전쟁 후 인민군 잔류 세력 등이 지리산(智異山), 회문산(回文山), 변산(邊山) 등에 입산하여 활동한 공산 게릴라를 이른다.

[역사적 배경]

전라북도 부안군은 6·25 전쟁 당시 북한군에게 점령되었다가, 유엔군의 인천 상륙 작전 성공으로 1950년 9월 28일 국군에 의해 수복되었다. 9·28 수복 이후 퇴로가 끊겨 미처 후퇴하지 못한 북한군들과 북한군 점령 당시 전라북도 부안 지역의 좌익 활동가나 북한군 협조자들이 군경의 진주 이후 변산에 입산하여 빨치산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경과]

빨치산 은 비정규 군사 조직으로 적의 배후에서 신속한 이동과 기습을 통해 적에게 피해를 입히는 소규모 전투 부대이다. 빨치산은 활동 지역의 지리와 지형에 밝은 사람들이 대원으로 활약했고, 지역 주민의 협조나 지원 없이는 생존할 수가 없었다.

1. 변산 빨치산의 활동 시기

변산 빨치산의 첫 번째 활동기는 1947년 3·22 사건 후 지명 수배자들이 변산에 근거지를 만들고 마을에 아지트를 마련해서 산과 마을을 드나들며 활동한 시기이다. 두 번째는 1949년 9·20 통일 투쟁을 조직했다가, 투쟁이 끝난 후 120명이 입산하여 활동한 시기이다. 생존자는 이용기를 비롯해 불과 몇 명에 불과했다. 세 번째는 9·28 수복 후에 상당수가 변산으로 들어가서 빨치산 활동을 한 시기이다. 변산 빨치산에는 전라북도 부안 지역 출신자들이 많았고, 북한군 점령 당시의 부역자들이 처벌이 두려워 입산한 경우도 많았다.

2. 변산 빨치산의 활동

1950년 10월에서 11월 사이 변산 입산자들은 주민까지 합해 약 1,000여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산되나, 2년 반 만에 죽기도 하고 산에서 빠져나가기도 하면서 거의 다 사라졌다.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언포에서는 동네 사람들이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집단으로 산에 들어갔다는 증언도 있었다. 변산은 골짜기가 많은 겹산이어서 숨기가 좋아 보이기는 하지만, 다른 지역과 연결이 어렵고 고립되기가 쉬워 빨치산이 활동하기에는 쉽지가 않은 지역이었다.

9·28 수복 후에도 변산 빨치산의 세력권이었던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에서는 빨치산들이 주민들에게 현물세를 받았다. 변산 빨치산들은 무력 투쟁 보다는 주민과 함께하는 설득 위주의 정치 공작 활동을 주로 했다. 공세적이기 보다는 수세적이었고 방어적이었다. 초기에는 주민들의 자발적인 협조로 상당한 지역을 세력 범위에 두었으나, 점차 군경의 토벌 공세에 쫓기면서 주민들과 멀어지게 되었다. 군경들이 강제로 빨치산들과 주민들을 분리하기도 했지만, 빨치산들이 북한으로부터 전혀 보급이 없는 상태에서 주민들에게 민폐를 끼쳤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빨치산들은 점차적인 인원 감소와 함께 피해 의식으로 주민들을 불신하게 되었고, 주민들도 빨치산들을 도우려 하지 않았다.

변산 빨치산들은 산속의 근거지와 지역에 만들어 놓은 비밀 아지트를 오가며 사람들을 만나고 식량 조달을 했다. 이 과정에서 산 사람들이 체포되면서 근거지인 비밀 굴들이 드러나 연이은 체포가 이어졌다. 변산 빨치산들은 첫 해인 1950년 겨울은 식량 걱정 없이 산에서 지낼 수 있었다. 산 주변의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에서 현물세를 걷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입산자가 많아지면서 한 마을을 통째로 약탈해 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전라북도 부안군 주산 출신의 김명곤이 남부 지도부의 군사 부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총과 화약을 공급했지만, 변산 빨치산의 화력은 총이 몇 자루뿐이었다. 1951년 2월에 경찰은 변산반도에 약 300명 정도의 빨치산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였다.

3. 변산 빨치산 토벌

빨치산 부안군 사령부는 입산 이후 처음에는 중계 등 인가가 있는 곳에 있었으나, 1951년 겨울을 지나면서 청림 노적 일부 인가를 빼고는 토벌대들이 소각시켜 버렸다. 총은 부장급 이상 간부들이 몇 자루 호신용으로 갖고 있었고, 전투 부대인 유격대원의 총은 20정 안팎이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가끔 도당 남부 지도부 사령관 박모 부대[속칭 와가리 부대]가 숫자 미상의 화기 등을 가지고 수일씩 전투를 하다 돌아갔다.

정세가 좋을 때는 의상봉(義湘峯)에서 제일 많이 주둔했다. 면당들은 자기 면과 지리상 편리한 곳에 트[아지트, 거점]를 잡아야 했고 무기는 기껏해야 사제 수류탄 한두 개 정도여서 항시 토벌대의 습격에 신경을 써야 했다. 면당에서는 사회에 나갔다 붙잡혀 자수하거나 또는 스스로 자수한 사람이 안내하여 거점이 습격당하는 사고가 빈번했다.

1951년 8사단의 춘기 대공세 때는 보안면당[면책 임병기]에서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입산자가 50명~60명으로 많아서 사고도 많고 이탈자도 생기고 자수자도 속출했다. 1951년 9월 12일부터 전라북도의 17대대와 18대대가 새벽 5시에 변산에 들어가, 청련암 최고봉을 점령한 다음 실상사(實相寺) 쪽에서 정면으로 공격하고 쌍선봉(雙仙峰) 부근을 수색하였다. 부안경찰서 부대는 옥녀봉, 덕성봉 고지를 각각 수색하면서 가마소로 빨치산을 유인하였다. 계속되는 경찰의 공격으로 두려움과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귀순해 오는 빨치산들이 늘어났다.

산에 있을 때는 습격의 위험이 있고, 산에서 나갈 때는 어디에 매복대가 있는지 모르니까 위험하고, 또한 선을 대서 산으로 들어올 때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변산은 험한 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한쪽은 바다이고 다른 한쪽은 들판이기 때문에, 한쪽만 차단하면 도주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차일혁의 수기에는 이 작전으로 25명이 사살되었고, 당시 북한군 복장의 여자 2명을 포함한 5명이 스스로 머리를 쏘아서 자결했다고 하였다. 북으로 돌아가지 못한 북한군 장교들이었다. 변산 작전은 사흘이 걸렸다.

[결과]

변산빨치산은 휴전 이후인 1954년 여름에 4명~5명이 마지막으로 사살되면서 전멸되었다. 변산 빨치산의 토벌에는 외부에서 들어온 부대의 역할도 있었지만 일시적이고 단기간의 작전이었고, 전라북도 부안의 경찰과 민간인들이 만든 향토 방위대의 역할이 컸다. 빨치산과 토벌대의 싸움 때문에 변산 안에서 농사짓고 살던 주민들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 경우도 많았다. 토벌 작전 과정에서 문화재인 월명암(月明庵)실상사가 불탄 것도 불행한 일이었다. 빨치산과 경찰의 거점으로 사용되다가 1951년을 거치면서 소실되었다.

[의의와 평가]

변산 입산자들 중에는 확고한 정치 이념으로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하려는 자들도 있었지만, 탄압을 피하기 위해 입산한 자들도 많았다. 빨치산 활동을 하며 투쟁하기 위해 산에 들어왔다기보다는 두려운 마음에 살기 위해서 빨치산이 된 사람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변산 빨치산들은 공세적이었기 보다는 수세적 입장이었고, 방어적이었다. 빨치산 중에 상당수는 사상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뛰어들었다가 정치가 만들어낸 가혹한 이념 전쟁의 희생자가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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