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리 조포 당산제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1114
한자 良山里-堂山祭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의례/제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계화면 양산리 조포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상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중단 시기/일시 1960대 무렵 - 양산리 조포 당산제 중단
의례 장소 당산 - 전라북도 부안군 계화면 양산리 조포마을지도보기
성격 민간 신앙|마을 제사
의례 시기/일시 음력 정월 초사흗날
신당/신체 당산나무[소실]|당집[초가집]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계화면 양산리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지내는 마을 제사.

[개설]

양산리 조포 당산제 는 음력 정월 초사흗날에 양산리 조포마을 당산에서 마을 사람들의 무병과 풍년을 빌며 지내는 마을 공동의 제사이다.

부안 지역에서 행해지는 당산제는 일반적으로 정월 초에서 보름날에 행하여지며, 제주는 종교적인 의미로 깨끗한 사람을 선정한다. 초상집에도 가지 않고 비린 것과 개고기를 먹지 않은 사람을 의미한다. 보통 제관, 축관, 집사 등을 선정한다. 제주는 보통 남자로 선정하는데, 제물은 주당산과 따로 준비한다. 제물은 돼지머리를 비롯하여 삼색실과, 주(酒), 포(脯), 떡 등이 준비된다. 비용은 일반적으로 마을 재산이나 공동으로 갹출한 것으로 충당한다. 제는 진설, 재배, 초헌, 축, 아헌, 종헌, 소지, 음복 순으로 유교식 절차로 진행되며, 제가 끝나면 함께 음복하고 마을의 대소사를 논의한다.

[연원 및 변천]

부안군 계화면 양산리 조포마을은 본래 동진면에 속했다. 계화도 간척 사업 이후에 계화면에 편입되었다. 섬마을이었던 조포마을은 간척 사업이 끝나자 육지화가 되면서 가장 많은 변화를 겪었고, 생업도 어업에서 농업으로 전환되었다. 조포마을 뒤에 있는 세포산에는 당산나무와 당집이 있었다. 양산리 조포 당산제는 1965년 무렵 간척 사업으로 산을 파헤치면서 당산나무와 당집이 없어지면서 중단되었다. 현재는 마을 사람 대부분이 교회에 다닌다.

[신당/신체의 형태]

양산리 조포마을 당산은 팽나무로 된 당산나무와 1칸 정도 되는 초가집으로 만든 당집이 있었다. 팽나무는 한 그루가 있었고, 주변에 참나무와 소나무 등이 있었다. 당집에는 호랑이, 수염 난 할아버지, 각시 등 무신도 10여 개 정도가 걸려 있었다. 이를 ‘산신님’, ‘영신님’ 등이라고 불렀다. 간척 사업이 진행될 무렵 마을 아이들의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절차]

양산리 조포 당산제 는 당시 음력 정월 초사흗날에 모셔졌다. ‘지만 모신다.’라고 하였다. 마을에 궂은일이 생기면 음력 이월 초하룻날로 연기되었다고 한다. 제관은 섣달 하순 무렵에 마을 회의를 통해서 선정하였다. 보통 ‘화주’라고 불렸다. 화주는 생기복덕에 맞추어 깨끗한 사람으로 뽑았다. 화주 이외에도 축관을 포함하여 3~4명을 뽑았다. 금줄은 임줄이라고 하는데, 초사흗날 아침에 화주 대문과 마을 입구에 쳐서 외부인의 출입을 막았다. 제비는 집집마다 쌀과 돈으로 추렴하였다. 제물은 화주가 부안장에서 구입하였다. 제기는 매년 새로 장만하여 당산제를 모셨다. 물건을 살 때는 절대 물건값을 깎지 않고 구입하였다. 제물은 돼지머리를 비롯하여 시루떡, 삼실과, 포, 편, 밥 등을 준비하였다. 제물은 당집과 당산나무 두 군데에 각각 진설하고 제를 모셨는데, 당집에서 먼저 지낸 다음 당산나무에 모셨다. 제는 진설, 재배, 초헌, 축, 아헌, 종헌, 소지, 음복 순으로 유교식 절차로 모셨다. 축문을 읽으며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소지를 올렸다.

[축문]

당산제의 축문은 전해지지 않는다. 소지를 올리면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부대 행사]

양산리 조포 당산제 를 마치고 나면 마을 사람들이 음식을 조금씩 나누어 먹는다. 그리고 굿을 치면서 놀게 되는데, 이때부터 집집마다 돌면서 지신밟기를 했다.

[현황]

부안군 계화면 양산리 조포마을에서는 당산제뿐만 아니라 음력 정월 중에 날을 받아서 용왕제도 모셨다. 이렇게 조포마을에서는 당산제와 용왕제를 모셨으나 계화도 간척 사업 이후에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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