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639
한자 金永年
영어공식명칭 Gim Yeongnyeon
이칭/별칭 경로(敬老),겁암(㤼庵),김필선(金弼善)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선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45년연표보기 - 김영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97년 - 김영년 호벌치 전투 참여
몰년 시기/일시 1597년연표보기 - 김영년 사망
출생지 옥천군 - 충청북도 옥천군
거주|이주지 부안현 -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도청리 수락마을지도보기
활동지 부안현 -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남포리지도보기
묘소 김영년 묘 - 전라북도 정읍시 입암면 연월리 산4번지
성격 의병
성별

[정의]

조선 후기 전라북도 부안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가계]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경로(敬老), 호는 겁암(㤼庵). 증조할아버지는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이다. 김문기의 자는 여공(汝恭), 호는 백촌(白村)이며, 호조 판서를 역임한 퇴휴당(退休堂) 김순(金順)의 손자이며 증영의정 김관(金觀)의 아들이다. 김문기는 1426년(세종 8)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는데, 1453년(단종 원년) 수양 대군(首陽大君)이 정변을 일으키고 1455년(단종 3) 왕위를 찬탈하자,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과 더불어 상왕의 복위를 시도하다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활동 사항]

김영년(金永年)[1545~1597]은 충청북도 옥천(沃川)에서 태어났다. 김문기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들킬까 우려하여 옥천을 떠나 지금의 부안군 변산면 도청리 수락마을로 이거한 후 ‘김필선(金弼善)’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초막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부안에 은거하던 중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영년은 흥덕(興德) 남당(南塘)[현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용반리 남당마을]으로 가서 야수(野叟) 채홍국(蔡弘國)이 주도한 ‘삽혈 동맹(揷血同盟)’에 참여하였다. 당시 삽혈 동맹에 참여한 사람들은 채홍국과 김영년 등 92명의 의사(義士)와 500여 명의 의병이었다고 한다. 김영년은 이후 담양, 곡성, 순천의 쌍암·주암, 남원, 순창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여하여 전공을 세웠다. 그런데 채홍국의 『야수실기(野叟實記)』에는 이들의 이동 경로만 기록되어 있다. 1593년(선조 26) 전황이 안정되자 김영년은 귀향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 왜군이 호남을 침범하자 남당 회맹에 참여하였던 92명의 의사가 다시 결집하여 부안 호벌치에 진을 치고 결전에 대비하였다. 이때 김영년은 향군 도감(餉軍都監)을 맡았다. 4월 중순 호벌치에서 왜군과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며 채홍국과 고덕붕(高德鵬)을 비롯한 대부분의 의병이 전사하였고, 김영년도 적의 부장 아이대(阿伊大)의 칼에 맞아 순절하였다. 김영년의 죽음을 목격한 아들 김헌과 노복 옥천쇠가 그의 시신을 안고 적진 속에 뛰어들었고, 마침내 적장을 붙잡아 죽여 원수를 갚았으나 적의 칼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순절하였다고 전한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겁암일기(㤼庵日記)』와 『겁암집(㤼庵集)』이 남아 있다.

[묘소]

김영년의 묘는 전라북도 정읍시 입암면 연월리 산4번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김영년은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신촌길 47-1[신촌리 304번지]에 있었던 왕산사(旺山祠)[현재는 없음]와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남당길 6[용반리 461-1번지]에 있는 모충사(慕忠祠), 부안군 상서면 부안로 1521[감교리 산138-9번지]에 있는 민충사(愍忠祠)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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