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고씨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585
한자 長興高氏
영어공식명칭 Jangheung Gossi|Jangheung Go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동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본관 장흥 - 전라남도 장흥군
입향지 장흥 고씨 입향지 - 전라북도 부안군
세거|집성지 장흥 고씨 세거지 -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유천리 버드내지도보기|상서면 청림리 노적메지도보기|진서면 운호리지도보기 여룬개
성씨 시조 고중연(高仲筵)
입향 시조 고응익(高應翼)|고응서(高應瑞)

[정의]

고중연을 시조로 하고, 고응익·고응서를 입향조로 하는 전라북도 부안군의 세거 성씨.

[개설]

장흥 고씨(長興高氏) 집안은 호남 지방의 4대 명문으로 꼽히는데 충절 지사를 비롯하여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연원]

장흥 고씨의 시조는 제주 고씨(濟州高氏) 고정(高挺)의 둘째 아들 고중연(高仲筵)이다. 고중연은 고려 후기 홍건적을 평정한 공으로 장흥백(長興伯)에 봉하여지고 양헌(良獻) 시호를 받았다. 이에 자손들이 장흥을 본관으로 삼았으며, 전라남도 영광으로 옮겨 살다가 조선 중종(中宗) 때 고운(高雲)이 광주로 이거하였다.

고운은 문과에 급제하고 호조 좌랑을 지냈으며 조광조(趙光祖)와 가까웠다. 고운의 아들 고맹영(高孟英)도 문과 급제자로 부제학(副提學)을 지냈다. 고맹영의 아들이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이다. 고경명은 문과에 장원 급제한 후 동래 부사를 역임하고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금산 전투에 참여하여 아들 고인후(高因厚)와 함께 순절하였다. 큰아들 고종후(高從厚)는 진주성 전투에서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삼부자(三父子)가 나라를 지키다 순절한 예는 드물다. 고종후와 고인후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고인후는 창평의 처가에 후손이 없어 외손봉사로 들어가 살았으므로 그 자손들을 ‘창평 고씨’라고 부른다.

[입향 경위]

학봉(鶴峰) 고인후의 현손 고응익(高應翼)이 17세기 숙종(肅宗) 때 처 부안 김씨(扶安金氏)의 고향인 부안 여룬개[운호포(雲湖浦), 현 부안군 진서면 운호리]로 이거하며 장흥 고씨 부안 입향조가 되었다. 그의 손자 고신겸(高信謙)은 영조(英祖) 때 무과에 급제하고 고을 수령을 지냈다. 고신겸의 손자 고한진(高翰鎭)이 여룬개에서 상서면 노적메[노적리]로 이주하여 세거하였으므로 ‘노적메 고씨’로 불렸다.

노적메 고씨 집안에서는 문과 1인, 무과 1인, 진사 4인을 배출하였다. 문과 급제자는 고한진의 손자 고필상(高必相)이고, 무과 급제자는 고신겸이다. 진사는 고신겸의 아들 고시훈(高時勳), 고신겸의 손자 고대진(高大鎭), 고대진의 아들 고제천(高濟川), 고한진의 손자 고규상(高圭相)이다. 하봉(夏峰) 고대진은 1813년(순조 13) 진사가 되었고 여룬개에 눌러 살았다. 근대 인물로는 상해 임시 정부 요인으로 활동한 고평(高平)이 있다. 노적리 고씨 집안은 조선 후기 부안에서 제일 명문으로 손꼽았다.

위 가닥과는 다르게 고응익의 아우 고응서(高應瑞)가 창평[현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에서 보안 버드내[현 보안면 유천리]로 이거하였다. 이들을 ‘버드내 고씨’라 불렀는데, 이들 또한 대대로 학문을 갈고 닦아 근동에 이름이 자자하였다.

[현황]

2015년 인구 주택 총조사에 따르면 부안군에는 고씨가 758명 살며, 이 중 장흥 고씨는 150명이다. 1985년 인구 조사 때는 100여 가구, 373명이 살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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