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533
한자 白山橋
영어공식명칭 Baeksan Bridge
이칭/별칭 백산 다리,작은 다리,흔 다리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 684-78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재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조성|건립 시기/일시 1927년 11월 11일연표보기 - 백산교 준공
훼손 시기/일시 1960년대 중반 - 백산교 훼손
개축|증축 시기/일시 1960년대 후반 - 백산교 보수
현 소재지 백산교 -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 684-78지도보기
원소재지 백산교 -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 684-78
성격 다리|교량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와 김제시 부량면을 연결하는 일제 강점기 다리.

[개설]

부안군 백산면과 김제시 부량면 사이에는 동진강(東津江)의 지류인 중복천이 흘러 차량이 통행할 수 없었다. 이러한 불편함을 해소하고자 부안군 백산면과 김제시 부량면을 연결하는 다리 공사를 시작하여 1927년 11월 11일에 ‘백산교(白山橋) 낙성식’이 열렸다. 백산교는 부안군에서 김제나 전주, 서울 등으로 가기 위한 유일한 통행로였으며, 50여 년 동안 부안군의 관문 역할을 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군산 지역에서 들어온 배들이 ‘약산이네 매가리간’ 쌀을 군산으로 실어 날랐고, ‘약산이네 점방’에 필요한 물건을 댈 배들이 백산교 어간에 물건을 풀었으며, 8·15 광복 후에는 젓배들이 다리 근처까지 들락거렸다. 다리 건너에는 백산 사진관이, 다리 근처에는 백일 정미소, 술집과 여관도 모여들었다.

일제 강점기 말부터 동진강을 파내서 물길을 돌리는 ‘동진강 직강 공사’가 시작되었다. 물길이 바뀐 동진강에 나무로 가교를 만들어 임시로 통행하였고, 이곳에 군개 다리[군포교]를 건설해서 1958년 10월에 완공하였다. 군개 다리가 완성되면서 군개 다리는 ‘큰 다리’, 백산 다리는 ‘작은 다리’, 혹은 ‘흔[헌] 다리’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1978년에 부안군 동진면과 김제시 죽산면 사이를 흐르는 동진강동진 대교가 건설되어 부안군의 관문 역할을 하게 되면서 백산교의 역할은 반감되었다. 1999년에는 국도 제29호선의 하원로에 백산교라는 새로운 다리가 건설되었는데, 교량의 길이는 30m, 교량의 폭은 19.5m이다.

[건립 경위]

신태인역은 호남선에 있는 기차역으로 1912년 12월에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하였다. 부안 지역과 신태인역과의 교통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1914년 4월경에 신태인과 부안 지역을 연결하는 도로가 준공되었다. 그러나 신태인과 부안군 사이에 흐르는 동진강중복천 때문에 차량이 지나다닐 수 없었다. 지역 사람들이 교량 건설의 필요성을 호소하였음에도 이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1915년에 부안군의 보조로 강을 건널 수 있는 작은 배 한 척을 마련하면서 사람들이 건널 수 있게 되었다.

부안 사람들은 외부로의 원활한 출입을 위하여 동진강의 다리 건설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부안군에서 강을 건너 외부로 나가기 위해서는 부안군 동진면~김제시 죽산면의 교량 건설과 부안군 백산면~김제시 부량면의 다리 건설이 필요하였는데, 백산면에서 부량면을 건너는 백산교 건설이 먼저 시작되었다. 『동아일보』 1927년 11월 15일자 기사에는 11월 11일에 거행된 ‘백산교 낙성식’이 소개되었다. 당시 부안군의 숙원 사업 가운데 하나인 백산교의 완공은 부안군을 다른 지역과 소통하게 하는 큰 사건이었다.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 시기(市基)[장터]와 지금의 백룡초등학교 뒤로 굽이굽이 흘러 원천리를 통하는 물길이 중복천이다. 물길이 깊고, 밀물 때면 바닷물이 육지로 밀고 들어오니 바닷물과 강물을 막으면서 다리 공사를 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공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1927년에야 완성되었다. 신문 자료에 따르면 부안군청의 총 공사비는 1만 2000여 원, 백산교의 총 공사비는 2만 8000여 원이었다. 부안군청 공사비보다 두 배가 더 들어간 대공사였고, 당시 전라북도에서는 드물게 큰 다리로 평가되었다.

[위치]

백산교부안군 백산면 용계리 684-78번지에 있다.

[형태]

시멘트 골조로 만든 교량이다. 차량 통행이 가능하도록 다리 위에 도로를 만들었고, 다리 난간에는 물길을 차단하고 조절하는 갑문(閘門)을 만들었다. 갑문을 만든 것은 바닷물을 차단하여 민물로 농사지을 농수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현황]

1960년대 중반에 백산교 중앙이 휘어져서 차가 지날 수 없게 되었는데, 1960년대 후반 다리를 보수하여 버스와 대형차들이 다시 건너다닐 수 있게 되었다. 백산교는 약 20m쯤 되었는데 지금은 도로에 묻혀 10여 m만 남아 있고, 다리도 휘어져 있다. 다리 밑에는 쇠를 잇대서 견고하게 만든 모습이 남아 있다. 현재는 형체만 남아 있으며, 차량 통행은 드물고 농로 정도로 쓰이고 있다.

[의의와 평가]

국도 제23호선이 지나는 동진강중복천에 일제 강점기인 1927년에 교량을 건설한 것은 인근 신태인역과의 교통의 중요성 때문일 것이다. 당시 바닷물이 통하는 물길 위에 다리를 건설한다는 것은 큰 기술이 필요하였고 재정 투입도 컸다. 백산교는 50여 년 동안 부안군에서 외부 지역으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 역할을 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공출된 식량이 백산교를 통해 신태인역이나 군산 지역으로 갔고, 징병과 징용으로 끌려가는 부안 사람들도 백산교를 건너 신태인역에서 기차로 우리나라 전역뿐만 아니라 외국으로까지 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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