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528
한자 李梅窓墓
이칭/별칭 매창이뜸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능묘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매창로 89[서외리 566]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최범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573년 - 이매창 출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610년 - 이매창 사망
조성 시기/일시 1610년연표보기 - 이매창 묘 조성
문화재 지정 일시 1983년 8월 24일연표보기 - 이매창 묘 전라북도 기념물 제65호 지정
현 소재지 이매창 묘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매창로 89[서외리 566]지도보기
성격
양식 봉토분
관련 인물 이매창(李梅窓)
소유자 부안군
관리자 부안군
문화재 지정 번호 전라북도 기념물 제65호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에 있는 조선 시대의 여류 시인 이매창의 묘.

[개설]

이매창(李梅窓)[1573~1610]은 조선 중기의 명기이자 여류 시인의 한 사람이다. 자는 천향(天香)이며, 스스로 호를 매창(梅窓)이라 하였다. 태어난 해가 계유년(癸酉年)이어서 계생(癸生, 桂生) 또는 계랑(癸娘)이라고 불렀고, 향금(香今)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아버지는 부안현(扶安縣)의 현리인 이탕종(李湯從)이다. 이매창은 시와 글씨가 뛰어나 황진이(黃眞伊)에 버금가는 기생 시인이었다. 이매창은 재질이 출중하여 아버지 이탕종에게서 한학을 배웠다고 한다. 거문고 연주도 즐겼다고 한다. 지성과 지모를 갖추어서인지 그녀를 탐낸 현감 서우관의 후처가 되었다가, 서우관의 부인이 시기가 심하여 그 집에서 나와 부안으로 내려와 자유 기생이 되었다고 하는 말도 있다. 하지만 이매창이 생존하였던 1573년(선조 6)부터 1610년(광해군 2) 사이에 부안 현감을 지냈던 사람 중에 서씨 성을 가진 현감은 없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전설은 잘못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중인이었던 이매창이 기생이 된 연유는 명확하지 않다.

이후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과 교산(蛟山) 허균(許筠), 묵재(黙齋) 이귀(李貴), 유천(柳川) 한준겸(韓浚謙), 덕현(德顯) 심광세(沈光世), 석주(石洲) 권필(權鞸) 같은 문인과 문신들이 이매창을 알아주고 깊이 사귀었다. 이 중에서 유희경과의 사랑은 유명하다. 이매창은 유희경을 평생 정인으로 가슴에 담고 살았다. 시인 신석정은 유희경과 이매창, 그리고 직소 폭포를 가리켜 ‘부안 삼절(扶安三絶)’이라고 하였다. 당시 유희경은 위항 시인(委巷詩人)으로 이름을 날려 부안 지역까지 알려졌었다.

이매창은 부안 지역에 놀러 온 유희경과 만나 서로 시를 주고받으며 풍류로서 즐겼다. 짧은 만남을 가진 뒤 이매창은 유희경에 대한 그리움과 서러움을 여러 편의 시에 남겼다. 그중의 한 편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가 『가곡원류(歌曲源流)』에 실려 전한다. 이화우에서 추풍낙엽(秋風落葉)으로 이어지는 시간적 이별이 일순간 천 리 공간을 뛰어넘어 그리운 임에게로 향하고 있다. 이매창이 유희경과 이별하고 지은 「이화우 흩날릴 제」는 이별가로 유명하다. 『가곡원류』에 “계랑은 부안의 이름난 기생이다. 시를 잘 지었으며, 『매창집』이 있다. 촌은 유희경의 애인이었는데 촌은이 서울로 돌아간 뒤에 소식이 없었으므로 이 노래를 지어 부르고 절개를 지켰다”고 나와 있다.

이매창은 평생 수백 편의 시를 남겼으나 거의 흩어져 없어졌고, 1668년(현종 9)에 부안의 아전들이 고을 사람들이 외어 전하던 58편을 구해 개암사(開巖寺)에서 목판본으로 『매창집』을 엮어 냈다. 당시 세계 어느 곳에서도 한 여인의 시집이 단행본으로 나온 예는 없었다. 시집이 나오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찾았고, 구하기가 힘들자 계속 찍어 내기를 요청하여 개암사의 재원이 바닥나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위치]

이매창 묘(李梅窓墓)는 부안군 부안읍 매창1길 25번지 부안문화원의 남쪽에 있다.

[변천]

1610년 여름, 이매창이 38세의 나이로 죽자 거문고와 함께 부안의 봉두메에 묻혔다. 사람들은 이곳을 ‘매창이뜸’이라 불렀고, 이매창이 죽은 지 45년 뒤인 1655년(효종 6)에 마을 사람들이 무덤 앞에 비석을 세웠다.

[형태]

토광 원분묘형이다. 이매창의 무덤 앞에는 상석(床石)과 향로석(香爐石) 등이 있고, 상석의 왼쪽에는 1917년에 세운 비석, 오른쪽에는 현대에 세운 비석이 있다. 측면에는 ‘이매창 묘’ 안내판이 있다. 1917년에 세운 비석의 크기는 높이 100㎝, 윗넓이 39㎝, 아래 넓이 35㎝이다. 현대의 비석에는 ‘지방 기념물 제65호 이매창 묘’라고 써 있다.

[금석문]

앞면에 ‘명원이매창지묘(名媛李梅窓之墓)’라고 써 있다. 뒷면에는 “매창의 이름은 향금(香今)이며, 호는 매창이다. 정덕 계유년[1573년]에 태어났다. 성장해서는 시를[사장(詞章)] 잘 지었다. 문집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가정 경술년[1610년]에 사망하였다. 만력 을미년[1595년]에 비석을 세웠다. 300여 년이 지나 [오래되어] 글자를 읽을 수가 없어 다시 비석을 세웠다. 이에 그 변천을 기록한다.[媛名香今 号梅窓 正德癸酉生 及長善詞章 有集行于世 嘉靖庚戌終 萬曆乙未立碣 歷年三百 字畫剥落 更改立石 仍記其蹟云个]”라고 써 있다.

[현황]

1917년에 부안 시인들의 모임인 부풍시사(扶風詩社)에서 비석을 다시 세우고 ‘명원이매창지묘’라고 새겼다. 부안의 문화계 인사들의 모임인 부풍율회(扶風律會)에서 매년 음력 4월 5일에 이매창의 묘소에 모여 매창제를 지낸다. 이매창 묘 주변은 현재 매창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묘소 남쪽에는 판소리 명창인 이중선의 무덤이 있다. 매창 공원 중앙에는 ‘매창 공원’이라고 써 있는 커다란 돌이 있으며, 「거문고를 타면서[탄금(彈琴)]」, 「님 그리워 병났어라[병중(病中)]」, 「옛 님을 생각하며[억고인(憶故人)]」, 「취하신 님께[증취객(贈醉客)]」, 「이화우」, 「어수대」, 「임 생각[규원(閨怨)]」 등의 시가 써 있는 이매창 시비와, 「매창 묘를 찾아서」[정비석], 「매창 묘에서」[김민성], 「매창뜸」[가람 이병기], 「매창을 생각하며」[유희경] 등이 써 있는 시비가 있다. 이외에 놀이터와 잔디 광장, 청소년 문화 마당, 다목적 운동장, 상징 광장, 전망대, 그리고 족구장과 부안문화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매창 묘는 1983년 8월 24일에 전라북도 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되어 부안군이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이매창은 가늘고 약한 선으로 자신의 숙명을 그대로 읊고 자유자재로 시어를 구사하였다. 이매창은 다재다능한 예술인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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