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498
한자 申浩旌閭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외하리 198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경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이전 시기/일시 1842년 - 신호 정려 남원시에서 부안군 부안읍 외하리 198번지로 이전
훼철|철거 시기/일시 2018년연표보기 - 신호 정려 철거
현 소재지 신호 정려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외하리 198지도보기
성격 정려
소유자 평산 신씨 문중
관리자 평산 신씨 문중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외하리에 있던 조선 시대 정려.

[개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충효 사상과 정절을 으뜸으로 삼았다. 조정에서도 이를 적극 권장하여, 충효열(忠孝烈)에 뛰어난 사람을 뽑아 정려(旌閭)를 내려 백성의 귀감이 되게 하였다. 정려의 종류에는 정려비와 정려문, 정려각 등이 있다. 신호 정려(申浩旌閭)는 조선 시대에 신호의 충렬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신호(申浩)[1539~1597]의 본관은 평산, 자는 심원(深源) 또는 언원(彦援)이다. 다른 이름은 신길(申洁)이다.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충순위(忠順衛)를 지낸 신희중(申希仲)이며, 어머니는 창녕 장씨(昌寧張氏)로 장희령(張希齡)의 딸이다. 장인은 전주 최씨(全州崔氏)이다. 신호는 선대 때부터 전라도 고부에 옮겨 살았다. 1567년(선조 즉위년)에 실시된 정묘 식년시(式年試) 무과에 급제하여 내외직을 역임하다가, 무용이 뛰어나다 하여 조산보 만호(造山堡萬戶)에 임명되었다. 북방에서 변경을 지킨 지 몇 년이 지나자, 왕은 너무 오래 고생한다 하고 도총부 도사(都摠府都事)를 삼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2년 전, 왕은 왜군이 혹시 쳐들어올지도 모른다 하여 무장들 중에 뛰어난 인물들을 발탁하여 남쪽 지방에 배치하였다. 당시 낙안 군수로 있던 신호는 정읍의 이순신(李舜臣), 순천의 권준(權俊), 흥양의 배흥립(裵興立), 광양의 어영담(魚泳潭) 등과 함께 기용되었다.

임진왜란 이 일어나자, 신호는 그 전해에 전라 좌수사로 발탁되었던 이순신을 도와 견내량(見乃梁)·안골포(安骨浦) 등의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워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에는 교룡산성 수어사(蛟龍山城守禦使)로 있었는데, 남원성(南原城)이 왜군에게 포위되자 이를 구원하러 갔다가 전사하였다. 1599년(선조 32)에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었고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남원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무장(武壯)이다. 1842년(헌종 8)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청녕군(淸寧君) 김동건(金東健)이 쓴 ‘충신통정대부장흥부사증자헌대부형조판서시무장 신공휘호지사우이봉비(忠臣通政大夫長興府使贈資憲大夫刑曹判書諡武壯 申公諱浩之祠宇移奉碑)’의 비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노비가 공을 따르면서 가지 않았다. 공은 상의를 벗고 이빨 한 개를 뽑아 그에게 주며 말하길, "너는 이것을 가지고 돌아가 오늘의 소식을 알려라. 나는 오늘 죽는 날이다"라고 했다. 더욱 몸을 떨쳐 힘을 다하였으나 병사 이복남 등과 같이 전사하고 말았다. 이날이 정유년 8월 16일이다. … … 어릴 적부터 뜻이 크고 기개가 있었으며, 기상과 절의가 널리 통하여 경전과 역사를 경시하고서 공부를 하여 벼슬에 나가는 것이었다. 융경(隆慶) 정묘년[1567년]에 무과에 발탁되어 안팎으로 실천하니, 무용이 드러나게 되어 조산보 만호 직책을 맡게 되었다. 얼마 안 돼 선조조에 특별히 내직으로 제수되어 왜를 경계하는 방책을 만들었으며, 낙안(樂安)을 지키는 관료로 선출되었다.

공은 매일 복파(伏波) 장군 마원(馬援)이 시신을 가죽에 싸 가지고 돌아갔다는 말을 외웠다. 스스로 경계하면서 남원을 구원할 마음뿐이었다. 평생 소장한 손톱과 머리털을 집안 사람에게 부치며 보여 주고 죽음으로써 결사 의지를 보였다. 이미 죽어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불가피하게 의관과 이빨과 머리카락으로 장사 지내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이미 선무원 종공신 1등으로 책봉하고 형조 판서와 순국 절의의 사우를 같은 날 죽은 사람들과 추증하였다. 편액을 충렬로 하여 사우를 짓게 하였으며, 사우를 같은 고을에서 죽은 충렬 송상현, 장무 김준과 함께 배향하였다. 효종조에 사액을 정충으로 하고 시호를 무장으로 내려 주어, 조정과 가문의 숭상하고 장려하는 절의를 지극히 하게 되었다.

지금[1842년]에 이르러 공의 8대손인 신재성(申在成)이 남원으로부터 공의 사우를 부안읍 외하리 198번지에 상량을 고쳐 짓게 되었고, 글을 나에 청하였다. 아, 공의 충절이 혁혁하여 족히 우주에 뻗쳐 일월처럼 빛난다면 구휼하게 될 줄을 알 것이니 어찌 반드시 내 문장이 되겠는가. 오직 사람들이 죽어도 세상에 멀리 후손들에게 정령 유적으로 계승되고, 간혹 도모할 수 없다고 해도 사람들로 하여금 표상으로 드날리는 까닭일 것이다. 사람들이 더 한층 우러러보아 그 뜻도 가상할 따름이다. 내가 삼가 살피건대, 공의 시호와 행장이 있어 가로되, 공의 행실이 순정하고 돈독하였기에 전후 시묘살이로 죽을 먹으며 6년을 생활하였다. 또한 말하길, 공이 낙안에 계실 때 임금이 붕어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서쪽을 바라보며 대성통곡하였다. 군량 일백 석과 군기 몇 가지고 전해도(田海道)로 나가니 이것이야말로 공의 효성을 미루어 충렬이 더하다는 것을 가히 알 만하였다. 무릇 우리 인사들이 이 문을 지나가게 되면 누군들 슬퍼서 눈물을 훔치며 감개무량하지 않겠는가. 비록 후대에 공의 자취를 듣고 공을 생각하게 될진저, 오히려 세상에 감격하여 우러러볼 것이다.”

[위치]

신호 정려부안군 부안읍 외하리 198번지에 있었다. 부안군 부안읍에서 지방도 제707호선을 타고 주산면 소재지 방향으로 가면 부안남초등학교가 나오고, 부안남초등학교를 지나 로터리에서 직진하면 신흥 상회 앞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돌모산로를 따라 직진하여 내요 보건 진료소 앞을 지나면 ‘돌모산’이라는 커다란 비석이 나온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1.4㎞ 직진하면 부안군 부안읍 외하리 마을 동편 끝이 나온다. 여기서 우측으로 들어가는 마을 길을 따라 200m를 가면 우측에 신호 정려비가 있다.

[변천]

1842년에 신호의 8대손인 신재성이 사우를 남원으로부터 현재 위치로 옮겨 와 상량을 고쳐 지었다. 2018년에 폭우로 무너져 철거하였다.

[형태]

무너지기 이전의 형태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었다. 기초석 위에 화강암으로 된 석주를 세우고, 그 위에 다시 기둥을 올렸다. 옆에는 비석 2개가 서 있었다. 비석은 화강암의 사각형 기단 위에 비신을 올리고 무궁화가 새겨진 개석을 올렸다. 비신에는 ‘충신통정대부행낙안군수증자헌대부형조판서시무장 신공휘호지정려(忠臣通政大夫行樂安郡守贈資憲大夫刑曹判書諡武壯 申公諱浩之旌閭)’, ‘충신통정대부장흥부사증자헌대부형조판서시무장신공휘호지사우이봉비’라고 써 있다. 비문의 크기는 각 높이145㎝×너비54㎝×두께 24㎝이다.

[현황]

현재 건물은 철거되어 없으며, 비석이 서 있다. 주변에 부재로 기와와 주초석이 남아 있는 상태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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