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495
한자 丁酉再亂胡伐峙戰蹟地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터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남포리 산17 외 11필지|상서면 부안로 1521[감교리 796-4]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최범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사항 시기/일시 1597년 - 호벌치 전투 시작
문화재 지정 일시 1976년 4월 2일연표보기 - 정유재란 호벌치 전적지 전라북도 기념물 제30호 지정
소재지 정유재란 호벌치 전적지 -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남포리 산17 외 11필지지도보기|상서면 부안로 1521[감교리 796-4]지도보기
성격 유적지|전적지
지정 면적 3만 1635㎡
소유자 부안군
관리자 부안군
문화재 지정 번호 전라북도 기념물 제30호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남포리상서면의 경계에 있는 호벌치 일대에서 정유재란 때 의병들이 왜군을 맞아 싸운 싸움터.

[개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영년(金永年), 채홍국(蔡弘國), 고덕붕(高德鵬), 조익령(趙益齡), 이대준(李大俊) 등이 흥덕(興德) 남당(南塘)에서 92명 삽혈 동맹(歃血同盟)을 맺고, 조군향사도감(調軍餉士都監)을 맡아 배풍(排風)에서 왜병과 싸워 큰 공을 세웠다. 이후 영남 곽재우(郭再祐)의 의진에 군량미 300석을 보내면서 순천(順天)까지 진격하던 중 평양에서 휴전 회담이 시작되어 전세가 중단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순창(淳昌) 적성강(赤城江) 변으로 회군하여 뒷날을 약속하고 각자 귀향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일본군은 해로를 통하여 줄포에 상륙하여 부안 지역을 분탕질하였다. 이에 맞서 부안 지역에서도 의병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김영년 등의 의병진은 92명 외에 33명을 추가하여 정유갱창 동맹(丁酉更倡同盟)을 맺고 유사시를 대비하고 있었다. 마침내 일본군이 부안의 호벌치로 쳐들어오자 약 일주간에 걸친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채홍국 삼부자와 김영년 부자를 비롯하여 많은 의병들이 희생되었다. 또한 김홍원(金弘遠), 유희방(柳希芳), 이유(李瑜)[함평] 등이 이끄는 의병들이 호벌치 일대에서 일본군의 침략에 맞서 산발적인 전투를 전개하였다.

유희방은 호벌치 전투에 출전하여 수백 명의 적을 참수하는 전공을 세웠으나, 일본군이 다시 쳐들어오자 유정자 고개[유정치]에서 싸우다가 1597년 9월 15일 31세의 나이로 순절하였다. 이유[함평]는 왜군들이 청등들에 들어와 온갖 만행과 살육을 저지르자 이웃 고을에 격문을 보내 의병 수백 명을 모집하여 일본군과 싸우다 3일 만에 중과부적으로 순절하였다. 정유재란으로 호남에 일본군이 밀려오자 조선 정부에서는 황신(黃愼)을 전라도 관찰사로 임명하여 일본군을 방어하게 하였다. 의병장 김홍원변산으로 피난 온 사람들을 설득하여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에 전라도 관찰사 황신은 김홍원에게 변산에 오는 적을 무찌르도록 하였다. 김홍원은 왜선이 변산에 오자 조방장 원신(元愼)과 함께 복병을 설치하였다. 김홍원은 원신 휘하의 채춘봉과 함께 호벌치에서 왜적과 전투를 벌여 이들을 패주시켰다. 호벌치 전투에 대한 시기에 대해서는 4월 설과 9월 설 등이 있으나, 9월에 전투가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변천]

1965년 8월에 호벌치 전적비를 건립하였다. 1993년 정유재란 시 일본군이 의병들의 코를 잘라 일본으로 보낸 것을 묻어 두었던 일본의 무덤에서 담아온 흙으로 코무덤을 만들었다. 2009년 5월 19일 호벌치 전적비 앞에 민충사(愍忠祠)를 건립하였다.

[위치]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상서면의 경계에 있는 호벌치로, 보안면 남포리 산17 외 11필지와 상서면 부안로 1521 일대이다.

[현황]

정유재란 호벌치 전적지에는 호벌치 전적비, 순절비, 오카야마 현 비젠[備前] 시에서 옮겨온 코무덤 등이 있다. 이 외에 석등, 호상(虎像) 한 쌍, 채홍국을 기리는 시비, 겁암 김영년의 추모시비, 민충사 등이 있다. 1976년 4월 2일 정유재란 호벌치 전적지가 전라북도 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었다. 지정 면적은 3만 1635㎡이다. 주변에 대한 발굴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의의와 평가]

정유재란 호벌치 전적지는 부안 지역 선비들과 농민, 천민, 승려 계층이 의병으로 뭉쳐서 일본군에 대항하여 최후까지 대항하여 싸운 전적지로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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