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462
한자 格浦行宮
이칭/별칭 격포진 행궁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건물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553-3지도보기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곽장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640년연표보기 - 격포 행궁 창건
개축|증축 시기/일시 1737년 - 격포 행궁 중수
성격 행궁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에 있던 조선 시대 행궁.

[개설]

행궁(行宮)은 임금이 궁 밖으로 행차하였을 때 임시로 머무르던 별궁(別宮) 혹은 이궁(離宮)이다. 고려 시대 및 조선 시대의 역대 임금들은 본궁 이외에 전국에 행궁을 세우고, 지방 순행 때 처소로 사용하거나 전란 발생 때 피난처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전라북도 지역에는 고려 시대 군산도의 숭산 행궁과 조선 시대 격포진(格浦鎭)격포 행궁(格浦行宮)이 있었다.

[위치]

격포 행궁이 있던 자리는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553-3번지 일원이다. 격포 행궁은 조선 시대 전라 우수영(全羅右水營) 관하의 격포진에서 안쪽으로 400m가량 떨어진 곳에 설치되었다.

[변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1747년(영조 23) 10월 2일 기사에 “옛날 인묘조(仁廟朝)에 검영(檢營)을 특별히 설치하고 또 행궁을 세웠는데”라고 나와 있으며, 『조선왕조실록』 1754년(영조 30) 5월 24일 기사에는 원경하(元景夏)가 “신의 선조(先祖)가 안번(按藩)할 때에 격포에 행궁을 창건하였고, [중략] 전 도신 서명구(徐命九)가 격포 행궁을 중수하고 신에게 글을 보내어 행궁 중수기(行宮重修記)를 청하였으므로”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조선왕조실록』 1640년(인조 18) 1월 30일 기사에 부안 격포에 진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위의 기록들에서 원경하가 선조로 표현한 사람은 원두표(元斗杓)를 말한다. 원두표는 1636년~1636년과 1637년~1638년, 1639년~1641년 등 세 차례에 걸쳐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역임하였다. 이 중 세 번째의 임기에 해당하는 1640년에 격포진이 만들어졌으므로, 이때 행궁도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서명구가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한 때는 1737년(영조 13) 8월부터 11월까지이므로 이때 행궁에 대한 중수가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강흔(姜俒)의 「격포 행궁기(格浦行宮記)」에서는 1640년에 격포진을 만들었고, 1724년(경종 4)에 행궁을 지었다고 하였으나, 실록의 기록과 맞지 않다. 1724년에 중수가 있었고 1737년에도 중수가 있었는데, 강흔이 1724년의 중수를 기록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형태]

격포 행궁은 『여지도서(輿地圖書)』나 『호남읍지(湖南邑誌)』에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고, 「부안격포도형변산좌우도」라는 지도에도 그 위치만 표시되어 있다. 현재는 행궁이 남아 있지 않아 구조 및 형태를 상세하게 파악할 수 없다.

[현황]

『영조실록(英祖實錄)』에는 1754년에 호남 지역의 어사로 나갔다 돌아온 홍자(洪梓)가 보고서를 올려 “격포 행궁을 설치한 것은 장차 뜻밖의 변란에 대비하기 위한 것인데, 행궁의 담 밖은 텅 빈 채 백성의 마을이나 창고의 저축이 하나도 없다”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시대 지도 『비변사인방안 지도(備邊司印方眼地圖)』에도 격포진의 안쪽에 행궁이 표기되어 있어 격포 행궁이 실존하였던 건물임을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강세황(姜世晃)의 「격포 유람기(格浦蓬萊記)」와 강세황의 아들 강흔의 「격포 행궁기」에도 격포 행궁에 대한 내용이 전하고 있다. 위의 기록들을 고려하면 격포 행궁의 위치는 현재 격포 궁항마을로 진입하는 진입로의 우측, 즉 월고리 봉수(月古里烽燧)의 동쪽 사면 하단부로 추정된다. 현재 이 지역은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기와 편과 백자 편이 산재해 있다. 백자 편 가운데는 관요(官窯)에서 공급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중품 이상의 것도 있어 이곳에 행궁이 있었을 가능성을 높여 준다. 격포 행궁의 위치와 그 현황을 파악하기 위한 정밀 지표 조사만이라도 추진되었으면 한다.

[강세황의 「격포 유람기」]

경인(庚寅)년[1770] 5월 나는 둘째 아들의 임지인 부안에 있었다. 친구인 임성여(任聖與)가 마침 정읍의 수령으로 있다가 부안으로 나를 찾아왔으므로 함께 격포를 유람했다. 서문을 나서 서남쪽으로 가는데, 왼쪽으로 봉우리가 수십 리에 걸쳐 이어져 있었으니 이것이 변산의 바깥 기슭이다. 우뚝 솟은 산봉우리에 구름이 머물고 출렁이는 물결은 온갖 기이한 형상을 보였다. 왼쪽으로 큰 바다와 나란하였는데, 안개와 파도가 끝이 없었다. 때때로 점 같은 여러 푸른 봉우리들이 수평선 끝에 떠 있어, 대왕등도(大王登島) 여러 섬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오시(五時)에 해창에 이르렀다. 해창변산 바깥에 있다. 그 앞이 포구와 가까웠다. 포구 밖의 기이한 봉우리는 뾰족하기가 바짝 세운 붓과 같았다. ‘바다 위 뾰쪽한 산 칼날과 같네’라는 시구를 읊조리며 유주의 산수도 이와 비슷할 것이라 생각했다. 만조라 물이 점점 불어나 앞길이 물결에 잠겨 있어서 나아가려 해도 갈 수가 없었다. 점심을 먹은 후 같이 유람하던 나(羅) 군과 함께 한가히 이야기하면서 조수가 빠지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해가 기울자 물살이 점차 줄어들어 말을 재촉하여 떠났다.

길은 매우 질척거렸으며 깨진 돌과 조개껍질이 땅 가득히 쭉 깔려 있었다. 산기슭이 조수에 씻기어서 바위들이 다 드러나 있었는데, 영롱하면서도 기묘하여 마치 조각한 듯 아름다웠다. 어떤 곳은 십 리[약 3.93㎞] 넘게 쭉 이어지기도 했고, 더러는 끊겼다가 다시 나오기도 했다. 만일 미불을 여기에 불러온다면, 일일이 다 절할 겨를이 없을 것이었다. 포복해서 지나가려니 그 모습이 우습기도 했다. 조수가 다 빠지지 않은 곳도 있어서 말이 물속을 걷기도 했다. 말 앞의 검푸른 바다는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물의 신선이 용을 타고 수면을 다니더라도 이보다 더 낫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따금 조수를 피해서 봉우리에 오르기도 하고, 더러는 진창을 만나 정강이까지 빠지기도 하였다. 석양이 바다에 가라앉자 엷은 구름이 그것을 감쌌다. 빛깔은 연지 같고 크기는 수레바퀴 같았다. 일출과 비교해 보면 어느 것이 더 기이한 장관인 줄 알지 못하겠다.

점차 어두컴컴해져서 길을 분간할 수 없었다. 진창에 자주 빠지고, 말과 마종들이 자빠지기도 했다. 마을 사람을 불러 횃불을 밝히고 이십여 리[7.85여 ㎞]를 갔다. 길의 높낮이만 분간될 뿐 산의 모양이나 바다 빛깔은 분별할 수 없었다. 길 옆에 때때로 잡목 무더기가 있어서 비로소 바닷가가 끝나고 산 고개를 오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다시 한 포구에 갔고, 포구를 또 지나 긴 뚝방에 올랐다. 뚝방 옆에 돌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이곳이 격포 만하루(挽河樓) 앞이다. 밤 이경(二更)에 가마에서 내려 숙소에 들었다. 집이 자못 널찍하였는데, 포진(浦鎭)의 군교들이 거처하는 곳이라 했다. 포진의 장수 한변철(韓弁哲)이 나와 인사를 했다. 저녁밥을 먹고 나니 이미 삼경(三更)이었다. 잠자리에 들어 곯아떨어졌다.

새벽에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탄성을 질렀다. 산과 바다의 승경이 눈에 가득했던 것이다. 어제는 어두운 안개 속에 있던 것이 아침이 오자 활짝 개어 문득 새롭게 보이니 더욱 기이하고 환상적이었다. 이 또한 유람의 신통하면서도 오묘한 경지이다. 밥을 급히 먹고는 만하루에 올랐다. 만하루는 진영(鎭營) 장수의 관아 앞에 있었다. 어제 거쳐 왔던 긴 뚝방은 바로 그 앞에 있었다. 뚝방 왼쪽에서는 조수가 넘실댔고, 오른쪽 넓은 비탈에는 물이 가득하였다. 비탈 바깥쪽을 빙 두른 산과 들에는 성긴 소나무들이 드문드문 서 있었다. 오른쪽으로 산허리를 바라보니 오래된 홰나무 몇 그루가 구름이 모인 듯 울창한 곳에 전각의 모서리가 우뚝 솟아 있었으니, 행궁이었다. 또 조금 동쪽의 뾰족한 봉우리들이 구름에 잠겨 있어 가마를 타고 올라 보았다. 정상은 야트막한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문에 들어서니 온갖 돌들이 높은 대를 이루고 있었고 누대 앞은 다섯 봉우리의 봉화대가 쭉 늘어서 있었다. 누대에 올라 서쪽으로 바라보니 넓고 넓은 푸른 바다가 하늘에 닿을 듯 끝이 없었다. 남쪽과 북쪽도 마찬가지였다. 아침 해가 비치니 찬란한 은빛으로 빛나서 위도(蝟島)에 있는 일곱 산을 지적할 수 있었으나, 모두 분별할 수는 없었다. 멀리 검은 콩 같은 몇 개의 점이 보이는데 모두 고기잡이배라 했다. 황홀하고 괴이하여 내 몸이 진짜 신선이 되어서 구름 밖에서 높이 나는 것 같았다. 눈이 아찔하고 다리가 후들거려 오래 머물 수는 없으므로 서로 옷을 잡으며 아래로 내려왔다. 임성여가 “고요한 밤 삼 만 리 파도, 밝은 달에 지팡이 휘두르며 하늘서 내려오네”라며 왕양명(王陽明)의 시를 읊었다. [이하는 빠져 있다.]

출처: 박동욱·서신혜 역, 『표암 강세황 산문 선집』[소명출판, 2008]

[강흔의 「격포 행궁기」]

부안현(扶安縣)의 관아 서문을 나와 들길로 이십 리를 가면 변산이다. 변산은 둘레가 구십여 리[35.35여 ㎞]인데 그 반쪽이 바닷물에 들어가 있다. 산을 안고서 동남쪽으로 이십 리를 가면 웅연도(熊淵島)이다. 여기에서 바닷배를 타고 산을 따라 아래로 삼십 리[약 11.78㎞]를 가면 동남쪽은 큰 바다이고, 서북쪽은 바로 산이다. 산세가 갈수록 둥그렇게 둘러싸고, 풍기(風氣)가 갈수록 단단하고 빽빽해지는데 이곳이 바로 격포진이다. 격포진은 산에 기대어 자리를 잡았고, 진 앞에 있는 만하루 밑까지 조수가 곧장 밀려들어 온다. 진에서 꺾어 서쪽으로 일 리[약 392.73m]를 가면 그곳이 바로 행궁이다.

행궁은 동쪽을 바라보고 뒤로 높은 봉우리에 기대 있다. 봉우리 뒤는 큰 바다이지만, 사면을 산이 감싸고 있어 행궁이 바닷가에 자리하고 있음을 전혀 알 길이 없다. 정전(正殿)은 열 칸이고, 동서 날개집은 여덟 칸이며, 누각 네 칸, 행각(行閣) 네 칸이다. 바깥문은 세 칸이고, 안문은 두 칸으로 담을 둘러쳤다. 단청이 심하게 벗겨졌으나 건물의 규모는 거창했다. 변산 지역 승려를 불러 모아 행궁을 지키고 있다.

선조 18년[1580]에 삼남 순검사(三南巡檢使) 박황(朴璜)과 관찰사 원두표가 조정에 보고하여 진을 설치하고, 경종 임금 4년 갑진년[1724]에 관찰사가 또 조정에 보고하여 이 행궁을 지었다. 행궁의 지세가 높은 산에 의지하여 험준하고, 또 험한 바다에 걸쳐 있어서 요새로 삼았다.

이 지역은 몹시 가파른 산이 백 리[약 39.27㎞]를 가로지르고 있다. 큰 바다가 여기에 이르면 칠산(七山) 앞바다에 막혀 해로의 목구멍이 된다. 돛을 달고 북쪽으로 항해하면 하루 밤낮 사이에 강화도에 곧장 도달할 수 있으므로 참으로 하늘이 만들어 놓은 험준한 지형이다. 선배들이 이 지역을 지키지 못하면 강화도조차 믿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진을 설치하고 행궁을 지었다. 그 큰 책략과 원대한 계획이 이와 같다.

정전 뒤편 가장 높은 봉우리에 있는 봉수대로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만 리에 층층이 이는 파도가 눈 아래 아스라하다. 서쪽으로 고군산도나 계화도(界火島) 등 여러 개의 섬을 바라보니 바둑판이 벌려 있고 별이 펼쳐진 모습이다. 주변 풍경을 두루 살피면서 감개한 기분으로 배회했다.

이윽고 격포진의 장교를 불러 무비(武備)에 관해 물었더니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진의 서쪽 일 리쯤 되는 곳에 대변정(待變亭)이 있는데 무기고입니다. 창은 부러지고 검은 무뎌졌으며, 깃발은 찢어지고 더러워져 어느 것 하나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전함 한 척과 양곡선 두 척, 척후선 세 척이 있어서 삼 년에 한 번 보수하고, 십 년에 한 번 지붕을 교체하는 것이 군율입니다. 지금 십여 년이 흘렀지만 감영이나 수영(水營)에서 물자와 인력을 대 주지 않습니다. 오래된 것은 벌써 훼손되어 버려 지금은 한 척도 남은 배가 없습니다.”

오호라! 국가가 태평스러워 바다에 외침의 물결이 일지 않으므로 백성들이 전쟁을 알리는 나발 소리를 듣지 못한 지 수백 년째다. 만에 하나 변경이 안정되지 않아 외적이 침략할 때 무비가 이렇듯 엉성하다면 지리상 이점을 활용할 길이 없다. 바닷가 백성들은 소금 독점과 어세(漁稅)에 핍박당해 생계를 잇지 못한 지 오래다. 풍속이 본디 교활하고 변덕이 심하므로 인화(人和)도 말할 것이 못 된다. 이런 사정이야 군현을 맡은 낮은 관리가 걱정할 일은 아니다만 조정의 많은 현명한 분들이 술 마시며 노래하고 흥겹게 잔치하는 여가에 잠깐만이라도 염두에 두고 있을는지 나는 모르겠다.

출처: 안대회·이현일 편역, 『한국 산문선』7-코끼리 보고서[민음사, 2017, 228쪽~230쪽]

* 원문에 목릉(穆陵) 18년 경진으로 되어 있다. ‘목릉’은 선조의 능호이고, ‘선조 18년’은 간지로는 을유년이다. 18년 경진은 인조 18년(1640)에 해당한다. 이어서 박황과 원두표가 격포진을 설치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인조 18년이다.

[의의와 평가]

격포 행궁은 수군 기지이자 전략상 요충지로, 격포진의 위상을 가장 진솔하게 대변해 주고 있기 때문에 학계의 관심과 행정 당국의 지원이 절실히 요청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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