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 사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386
한자 -事件
영어공식명칭 March 22nd General Strike Struggle
이칭/별칭 3·22 민주 항쟁,3·22 폭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재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47년 3월 22일연표보기 - 3·22 사건 시작
종결 시기/일시 1947년 3월 22일연표보기 - 3·22 사건 종결
발생|시작 장소 부안경찰서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지도보기
발생|시작 장소 산두재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옹정리지도보기
발생|시작 장소 보안면 -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상입석4리지도보기
발생|시작 장소 줄포면 - 전라북도 부안군 줄포면 난산리지도보기
성격 사건
관련 인물/단체 부안 남로당|김태종|김상용|허영철|김용락

[정의]

1947년 3월 22일 전라북도 부안군에서 일어난 좌익 세력의 24시간 총파업 투쟁.

[개설]

1947년 3월 22일 전국에서 24시간 총파업 투쟁이 일어났다. 전라북도 부안에서도 총파업 투쟁이 일어났으나 부안 남로당의 확대 해석으로 총파업의 규모가 군민 항쟁 형태로 확대되었다. 3·22 사건이 발생한 것이었다. 이후 남로당 간부들은 경찰에 쫓겨 대부분 피신했고, 영문도 모른 채 총파업에 참여했던 상당수 주민들이 유치장에 구속 수감되었다. 전라북도 부안의 좌익 조직은 3·22 사건으로 인해 실체가 드러나게 되면서 급속한 와해의 길을 걷게 되었다.

3·22 사건 은 1946년의 10월 항쟁 때 불참했던 부안의 이미지 개선을 위한 과도한 투쟁이었다는 평가와 함께, 좌익이 택한 폭력적인 투쟁 방법 때문에 지역에서 대중성을 잃어버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숨어 있던 좌익 조직과 드러내지 않고 좌익을 후원했던 우익의 명단이 알려지면서 조직이 크게 훼손되었다.

[역사적 배경]

1946년 9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임금 인상과 생활 개선을 요구하며 총파업을 시작하였다. 당시 총파업은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정치 투쟁으로 전개되어 ‘10월 인민 항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전평의 투쟁에도 노동자의 생활은 좋아지지 않았고, 미군정은 전평 탄압을 더욱 강화하였다. 전평은 미군정에 노동 운동의 자유 보장을 요구하였다. 3·1절에는 평화 시위 중이던 제주 도민에 대한 미군정의 발포로 6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전평은 1947년 3월 22일 ‘남조선해고폭압반대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24시간 총파업 투쟁’을 벌였다. 24시간 총파업 투쟁은 남로당과 민주주의민족전선 등이 연합한 본격적 정치 투쟁이었고,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을 즉시 실시하라”,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넘겨라” 등의 정치 구호를 앞세우며 전개되었다.

[경과]

3·22 사건 은 전라북도 부안에서는 단순하게 24시간 총파업에만 그치지 않고, 남로당이 당력을 모아서 경찰서를 습격하고 경찰과 대치하면서 사상자까지 나오는 등 전역에서 다양하게 일어났다.

1. 부안읍 상황

3월 22일에 부안경찰서를 향해 가는 부안 군민들이 많았다. 증언에 따르면, 부안초등학교 고학년들도 부안경찰서를 습격하는 대열에 끼었다고 한다. 그러나 경찰서를 지키는 경찰들의 총소리에 놀라서 더 이상 접근하지는 못했고,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남쪽에 있는 옹정의 북쪽 옆 야산인 산두재[산두현(傘頭峴)]에서는 부안읍, 동진면, 행안면의 남로당 관계자들이 군중대회를 열었다. 이후 이들은 부안경찰서를 습격하여 접수하려고 읍내를 향해 가다가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의 오리정 근처에서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경찰의 발포로 수 명이 죽거나 총상을 입고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한때 각 면의 경찰들이 모두 본서로 철수하는 등 치안 공백 상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2. 보안면 상황

3·22 집회는 경찰의 습격을 피해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상입석리의 산에서 오전 10시에 시작되었다. 군당에서는 위원장인 김태종과 선전 부장 김상용이 참여했다. 보고문 낭독은 면당 책임자인 김용락이 하고 결의문 낭독은 면 민청 위원장인 허영철이 했다. 그 내용은 첫째, 미소 공동 위원회를 개최하라는 것, 둘째, 토지의 민주개혁 관철하라는 것, 셋째, 농민들의 이해관계에 관계된 문제들을 발표한 것 등이었다.

집회가 끝나고 면사무소까지 가는데 2~3㎞가량 사람들이 늘어섰다. 길옆의 경찰들이 평화적인 시위대에 총을 쏘았다. 여러 사람이 부상을 당하고 유천 사람이 죽자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영전리에 있는 면사무소와 지서에 방화하였다. 지서와 면사무소를 평정한 후 오후 1시에 마무리 해산 집회를 하고 있었다. 이때 미군이 통역관 1명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누가 책임자냐?”고 물었다. 미군이 아무런 해결도 못하고 요구 사항만 듣고 가려 했고, 모인 사람들이 미군의 지프차를 불사르자, 전라북도 부안군 줄포 쪽으로 가면서 총을 쏘아댔다.

3. 줄포면 상황

전라북도 부안군 줄포면에서는 3월 22일 아침 경찰 두 명이 줄포면 난산리 마을에 총을 메고 순찰을 나왔다. 마을에서는 경찰을 창고에 가두고 총을 빼앗았다. 그런데 시위 도중에 경찰의 발포로 십여 명의 사상자가 나자, 분노한 군중들이 감금했던 경찰들을 끌어내 보복 살해하였다.

[결과]

1947년 3월 22일 남로당이 전국 24시간 총파업 투쟁 지령을 내렸고, 전라북도 부안에서는 부안 남로당의 확대 해석으로 총파업이 과잉 투쟁으로 이어지며 규모가 군민 항쟁 형태로 확대되었다. 이를 계기로 탄압과 테러의 구실을 주었고, 남로당 조직 간부들은 대부분이 피신을 했다. 영문도 모르고 참여했던 사람 중 상당수가 유치장에 구속 수감되었으며, 고문으로 갖은 해를 당했다. 또한 전라북도 부안의 좌익 조직이 실체가 드러나며 급속히 와해되는 길을 걷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전라북도 부안에서는 24시간 시한부 총파업을 확대 해석하여 군민 항쟁으로 확대하였다. 당시 전라북도 부안 지역의 총파업에 대해서는 좌익 진영에서는 ‘부안 3·22 민주 항쟁’이라 하고, 우익 진영에서는 ‘부안 3·22 폭동’이라고 부를 정도로 평가가 갈린다. 또한 1946년의 10월 항쟁 때 불참했던 부안의 이미지 개선을 위한 ‘보여 주기식 체면치레의 잘못된 투쟁’이라는 평가도 있다. 3·22 사건은 좌익의 폭력적인 투쟁 방법 때문에 지역에서 대중성을 잃어버리는 계기가 되었고, 또한 숨어 있던 좌익 조직의 명단과 함께 드러내지 않고 좌익을 후원했던 우익의 명단도 드러나면서 조직이 크게 훼손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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