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정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383
한자 美軍政期
영어공식명칭 Period of U.S.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이칭/별칭 미군 통치기,미소 강점기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재철

[정의]

1945년 9월 9일부터 1948년 8월 14일까지 전라북도 부안군을 포함한 남한 지역을 미군이 통치한 시기.

[개설]

광복 후 일제 강점기의 질곡에서 벗어난 한국인들에게는 친일파 청산과 자주 독립 국가 건설이라는 새로운 시대적 과제의 해결이 중요했다. 그러나 미국은 자본주의 세계 질서의 유지 및 재편성을 목표로 광복 이전부터 한국에 대한 신탁 통치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당시 한국과 미국은 한국 정부 수립에 대한 입장 차가 너무 커서 서로 갈등하고 있었다. 미국의 목표는 자국의 국익 달성을 위해 친미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고, 미군정은 이런 미국의 입장을 충실히 반영·수행하기 위해 실시된 것이었다.

1945년 11월 14일 전라북도 정읍에 44군정 중대가 주둔하면서 정읍·고창과 함께 부안에서도 미군정이 시작되어 행정과 치안을 미군이 담당하게 되었다. 모스크바 삼상 회의에서 한국 문제의 해결을 위해 미소 공동 위원회가 설치되었으나, 한국에 대한 신탁 통치 문제를 놓고 대립하다가 결렬되었다. 유엔 소총회에서는 미국의 입장에 따라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접근할 수 있는 남한 지역만의 단독 총선거 실시를 결의하였다.

한국은 미군정 하에서 5·10 선거를 통해 제헌 국회 의원을 선출했지만, 김구(金九)[1876~1949]의 한국독립당, 김규식(金奎植)의 중도파, 공산주의자 등의 세력들은 선거에 불참하였다. 남한에서는 1948년 7월 17일 제헌 국회의 헌법 제정에 이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며 공식 출범하였다. 같은 해 9월 9일 북한에서도 단독 정부가 수립되면서 남북 단일 정부 수립 노력이 실패로 끝났고, 3년간에 걸친 남한에서의 미군정도 종식되었다.

[미군정과 전라북도 부안]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며 한반도는 광복을 맞았다. 여운형(呂運亨)[1886~1947] 등은 건국동맹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준]로 확대 개편했고, 건국준비위원회는 1945년 8월 말까지 지방 세력의 호응을 받아 전국에 145개 지부를 두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 총독부가 행정권 등을 제대로 이양하지 않아 마찰이 빚어졌다. 행정권을 미국에게 이양하라는 일제 본국의 지시가 떨어졌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1945년 미소의 한반도 분할 점령 결정에 따라 존 하지(John Reed Hodge) 중장이 지휘하는 미 육군 24군단이 9월 8일 인천에 상륙한 뒤 서울로 들어왔고, 다음 날인 1945년 9월 9일 삼팔선 이남 지역에 대한 군정을 포고하였다. 이어 1945년 9월 12일 아놀드(A.V. Arnold) 소장이 미군정 장관에 취임하여 미군정 체제가 수립되었고, 미군은 행정권·치안권의 장악과 함께 군정청을 설치하여 1948년 8월 15일 단독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3년 동안 남한에서 군사 통치를 실시하였다.

미군의 지역 배치는 대개 3단계를 거쳐 이루어졌다. 첫 번째 단계는 진주 직후 장교들로 구성된 정찰 팀이 주요 도시 등에 체류하면서 미군 진주를 알리고 지역 상황을 정찰하였다. 두 번째 단계는 대규모 전술 부대들이 시군을 점령했고, 마지막 단계는 군정 통치 관련 훈련을 받고 장비를 갖춘 군정 중대들이 군 단위에 진출함으로써 배치가 완료되었다.

1945년 11월 14일 전라북도 정읍에 44군정 중대가 주둔하면서 정읍·고창과 함께 부안에서도 미군정이 시작되었다. 전라북도 정읍에 미군이 배치된 것은 정읍이 기차역이 있는 교통의 중심지로서 중앙과의 연결이 편리하고 부근 지역 관할이 용이한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전라북도의 교통 요지가 광복 직후에는 미군 점령의 주요 거점 지역이 된 것이었다. 군정 중대는 장교 12명과 사병 60명으로 구성되었고, 각 군에는 장교 1명과 사병 3명으로 구성된 1개 군정 팀을 배치하였다.

당시 전라북도 부안에서 활동한 미군 군정 팀이 사안에 따라 정읍에서 파견되던 것이었는지, 아니면 부안의 일정 지역에서 주둔했던 것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군청 앞의 부안금융조합에서 미군을 봤다는 사람의 증언도 있고, 1947년 3·22 사건 때 미군의 활동 기록도 보인다. 허영철의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에는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에서 이루어지는 3·22 사건에 미군이 나타났다. 이들 미군은 집회가 시작될 무렵, 갑자기 지프를 타고 기관총을 메고 질주하듯이 밀어닥쳤다. 이들은 대표자가 누군지를 찾고, 자기가 부안 지역의 치안과 질서 유지를 담당한다면서 해산할 것을 요구했다. 미군은 시간이 지나도 군중들이 해산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돌아가려했지만, 청년들이 미군의 지프차를 불살랐다. 화가 난 미군은 공중에다 계속 공포를 발사하면서 돌아갔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당시 전라북도 부안 지역에서 미군을 자주 볼 수 없어 미군정의 지배를 실감하지 못했다 해도, 부안 지역에서도 이미 미군이 행정과 치안을 장악한 상황이었다. 미군은 조선 총독부가 남긴 기존 기구, 즉 기존 행정 조직이나 경찰의 활용을 통해서 치안 활동과 함께 적산(敵産) 관리도 하면서 지역에 대한 통제력과 영향력을 강화해 나갔다. 이는 미군의 전라북도 부안군을 포함하는 남한 지역 점령 및 미군정의 실시가 일제 강점기 때의 행정·치안 체제를 기본으로 한 것이었고, 따라서 광복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좌우 대립과 총선]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으로 광복을 맞은 한국이었지만, 일제 강점기에 짓밟힌 비정상의 사회가 일시에 정상으로 회복되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 국민에게는 일제 강점기의 질곡에서 벗어나 친일파 청산과 자주 독립 국가 건설이라는 새로운 시대적 과제가 부여되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 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5년간의 신탁 통치를 결정했으나, 한국에서는 좌·우익 단체 모두 새로운 강대국에 의한 과거 식민 통치의 연장으로 보고 신탁 통치 절대 배격의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좌익 세력은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의 진의가 미소 공동 위원회의 구성을 통한 임시 정부의 구성과 조속한 조선의 독립에 있다는 것을 알고 삼상 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반면 남한의 우익 정당과 사회단체는 계속해서 신탁 통치를 반대하여 좌우익 간의 심각한 대립이 시작되었다. 한국 문제의 해결을 위해 모스크바 삼상 회의에서의 합의로 미소 공동 위원회가 설치되었으나, 한국에 대한 신탁 통치 문제를 놓고 대립하였다.

냉전이 격화되며 제2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되었고,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에 상정하였다. 유엔 총회에서는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구성과 함께, 그 감시 아래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 정부를 수립하자는 미국의 상정안이 가결되었다. 그러나 소련과 북한의 거부로 총선거를 할 수 없게 되었고, 유엔 소총회에서는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접근 가능한 남한 지역만의 단독 총선거 실시를 결의하였다.

당시 전라북도 부안 지역의 좌익은 3·22 투쟁과 미소 공동 위원회의 계속 추진 투쟁을 거치면서 조직이 드러나며 많이 와해되었다. 그러나 다시 조직을 수습하여 1948년 2월 7일 유엔 선거감시위원단의 입국을 반대하는 2·7 투쟁을 전개했고, 이어 2·26 투쟁도 전개하였다. 남한 지역만의 단독 선거를 실시하려는 유엔 소총회의 결의에 반대하는 투쟁이었다. 미군정 하에서 5·10 선거를 통해 제헌 국회 의원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김구의 한국독립당, 김규식의 중도파, 공산주의자 등의 세력들은 선거에 불참하였다. 1948년 7월 17일 제헌 국회의 헌법 제정과 함께 대통령을 선출한 데 이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였다. 같은 해 9월 9일 북한에서도 단독 정부가 수립되면서 남북 단일 정부 수립 노력이 실패로 끝났고, 3년간에 걸친 남한에서의 미군정도 종식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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