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의병 운동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373
한자 抗日義兵運動
영어공식명칭 Anti-Japanese Righteous Army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임혜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의병 운동
관련 인물/단체 이성화|김영진|유장열|이경선|김방언|김내서|정판용|채복만|박경석|양사언

[정의]

1890년대 후반부터 1910년까지 전라북도 부안군 지역에서 일제 침략에 맞서 전개한 의병 투쟁.

[개설]

항일 의병 운동 은 시기에 따라 일제 침략과 의병 전쟁 발단기의 전기 의병 운동, 일제의 반식민지적 강요와 의병 전쟁 전개기의 중기 의병 운동,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과 의병 전쟁 발전기의 후기 의병 운동, 대한제국 멸망과 독립군 작전기의 전환기 의병 운동, 일제 식민 통치 당시 유격 항전기의 말기 의병 운동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전라북도 부안 지역과 관련한 항일 의병 운동은 후기 의병 운동 기간에 많이 활발했고, 주로 부안 출신의 의병들이 후기 의병 운동 기간에 활동한 여러 의진에 가입하여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경과]

전라북도 부안 출신 의병들은 주로 이성화(李成化) 의진, 김영진(金永鎭) 의진, 유장열(柳章烈) 의진에서 활동하였다. 이성화는 고부군 출신으로 1908년 5월~6월 무렵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이웃한 부안에서 다수가 이성화 의진에 참여하였다. 이성화의 의병 부대가 무장 투쟁을 가장 활발하게 벌인 시기는 1909년 4월에서 6월 사이였다. 1909년 7월에 일본 경찰이 밝힌 ‘폭도 세력 비교표’에 의하면, 이성화 부대의 활동 회수는 6월에 13건, 7월에는 26회에 달했다. 이성화 의진은 군자금을 마련하면서 지방의 유력가나 친일적인 집안을 습격하였다. 1909년 7월 소수의 휘하와 함께 지도, 위도(蝟島), 식도(食島), 비력도 등을 돌면서 군자금을 확보하였다. 이성화 의진에 참여한 부안 출신 의병으로는 이경선(李京先), 김방언(金方言) 등이 있었다.

김영진은 전라북도 고창군 출신으로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 후 왜적을 물리치겠다는 뜻을 세우고 주변 지역에 통문을 돌려 창의하였다. 1908년 2월 의병과 무기를 모아 군율을 정비한 후에 단을 쌓아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재배하고, “우리 백성들은 오직 죽음을 각오할 뿐이다. 죽음에 어찌 명분이 없으리오. 진실로 왜적들에게 굴복하지 않는다면 하루를 살더라도 또한 영예로운 일이다. 바라건대 우리의 힘을 모두 합쳐 이 일을 잘 완수하자”고 명세하며 분발을 촉구하니 군사들이 진심으로 복종하였다. 김영진은 주변에서 모인 군사 100여 명을 거느리고 무장[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당시 무장군], 고창, 정읍, 부안 등지를 누비며 무장 투쟁을 이어가다가, 1908년 10월 일본 기병대와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김영진 의진에 참여한 부안 출신 의병으로는 김내서(金乃西), 정판용(鄭判用) 등이 있었다.

유장열도 전라북도 고창군 출신으로 1907년 이석용(李錫庸)의 의진에서 의병 활동을 하다가 이석용 의진이 해산하자 동료들을 모아 스스로 의병장이 되었다. 이때 부안 출신 채복만(蔡福萬), 박경석(朴景錫), 박경석(朴京石), 양사언(梁士彦) 등이 함께 하였다. 채복만과 박경석은 1909년 3월 동료 10명과 함께 부안 하서의 백참봉과 하동면 석동리 김익삼(金益三)으로부터 각각 50냥의 군자금을 징수하였다.

한편, 충청남도 정산군 남이면 곤산리[현 청양군 청남면] 출신의 최종현(崔宗鉉)은 승려 출신으로서 이용서(李用西)를 비롯한 12명의 동지와 총검으로 무장하고 부안 지역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손태흥(孫泰興)은 1912년 9월 고종(高宗)의 밀지를 받고, 임병찬(林炳瓚)이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할 때 임병찬의 손자 임당(林鏜)과 함께 진안, 장수, 무주, 용담, 금산, 진산, 익산, 고산 등 8군을 순회하며 동지를 포합하여, 부안군 대표로 선정되었다. 독립의군부 부안군 대표는 손태흥, 장현갑(張鉉甲), 강치형(姜致馨), 오상철(吳相喆), 장서규(張瑞奎), 오백영(吳栢泳), 김민술(金敏述), 김교웅(金敎雄), 은성대(殷成大) 등이었다.

김내서는 부안군 상서면 우덕리에 살던 농민으로 1908년 9월 21일부터 김영진의 부대에 들어가 의병 활동을 하다가, 일본군에 붙잡혔다. 1909년 7월 28일 재판에서 징역 2년을 선고 받았고, 당시 나이는 31세였다. 김방언은 1880년(고종 17)에 당시의 부안군 우산내면 굴막동(屈幕洞)에서 태어났다. 김방언은 이성화의 의진에 들어가 1908년 음력 12월 2일에 부안군 하서면 청일리 고한철(高漢徹)에게서 70냥, 11일에 동면 돈지리 이경백(李京白)에게서 20냥, 짚신 10켤레, 무명베 2필 등의 군수 물품을 징수하다가 체포되어 7년형을 선고 받았다.

박경석(朴景錫)은 부안군 소산면 신율포리에 거주하던 농민으로 1909년 2월에서 4월까지 유장열의 휘하에서 의병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8월에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재판에서 징역 5년을 선고 받았고, 당시 나이는 22세였다. 박경석(朴京石)은 부안군 소산면 율포에 살며 주막을 경영하다가, 1909년에 유장열 휘하에서 의병 활동을 하였다. 같은 해 8월에 일본 수색대에 체포되었다. 양사언은 부안군 소산면 화정리에 살던 농민으로 1909년에 유장열 휘하에서 의병 활동을 하였다. 같은 해 8월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당시 나이는 31세였다.

이경선은 1858년에 부안군 하서면 구지산리에서 태어났고, 이성화 의진에 가담하여 의병 활동을 하였다. 1909년 8월 25일에 징역 5년형을 선고 받았다. 재판 기록에는 이경선은 1909년 7월 15일에 대장 이성화 등 의병 8명과 함께 전라남도 지도군 경화도 상리 이도여(李道汝)에게서 20원, 동리 백서방(白書房)[실명 미상]에게서 20원, 7월 17일에 지도군 위도면 추념리 이장 송모(宋某)[실명 미상]에게서 20원, 태화황리 동장에게서 16원 등의 군자금을 징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정판용은 부안군 좌산내면 사동(寺洞) 출신의 농민으로 28세 때인 1908년 5월 말경에 김영진의 부대에 들어갔다. 5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의병 활동을 하다가, 일본군에 붙잡혀 재판에서 징역 10년을 선고 받았다. 채복만은 부안군 소산면 신율포에 살던 농민으로 1909년에 유장열 휘하에서 의병 활동에 참여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같은 해 11월 재판에서 징역 7년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당시 나이는 22세였다.

[의의와 평가]

부안의 의병들은 여러 방면에서 주로 후기 의병 운동에 많이 참여했고, 한일 병합 후에도 굴하지 않고 대한독립의군부 창설에 적극 가담하며 독립을 위한 무장 투쟁을 이어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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