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신라 시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342
한자 統一新羅時代
영어공식명칭 Tongil Silla Sidae|Unified Silla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집필자 김병남

[정의]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부터 고려 건국 이전까지 전라북도 부안 지역의 역사.

[신라적 통치 질서의 확립]

660년 백제 멸망 이후 부안을 비롯한 백제의 옛 땅은 신라가 아닌 당나라 군의 점령 아래에 놓였다. 부흥 백제국이 실패하고 이 지역은 당령(唐領)의 고사주로서 명맥을 이어 갔다. 당은 옛 백제 땅을 직할 영역으로 삼고자 664년~665년 사이에 1도독부, 7주, 51현 체제로 재편하였다. 즉 동명주[충청남도 공주시], 지심주[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노산주[전라북도 익산시 함열읍], 사반주[전라남도 영광군], 대방주[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분차주[전라남도 담양군]와 함께 부안 지역은 고사주에 속하게 되었다. 고사주는 평왜현[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부안군 백산면], 대산현[정읍시 칠보면], 벽성현[전라북도 김제시], 좌찬현[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순모현[김제시 만경읍]의 5현을 거느려 대략 현재의 부안·정읍·김제·고창 지역으로, 전라북도 황해안 일대의 모든 지역이 해당하는 것으로 보아 백제의 지역 거점인 중방 고사성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았음을 알게 한다.

그리고 670년(문무왕 10) 나당 전쟁이 시작되고, 671년에는 옛 백제 지역의 당 세력을 축출하면서 비로소 신라의 영역이 되었다. 이처럼 신라에 병합된 옛 백제 영토는 685년(신문왕 5)까지 신라식의 4주[사비주·완산주·발라주·청주]와 3소경[금관소경·서원소경·남원소경] 및 다수의 군현으로 재편되어 점차 신라화가 진행되었다.

기록에는 이 지역이 대산군[태인·정읍]과 고부군[고부·부안]의 2개 지역으로 대별되었음이 확인된다. 그중 부안은 고부군의 한 부분으로 나오는데 바로 부령현희안현이다. 고부군은 현재의 정읍시 일부와 고부면, 소성면, 덕천면, 정우면, 이평면, 영원면 및 부안군 백산면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부령현(扶寧縣)은 백제 때의 개화현(皆火縣)으로 지금의 부안군 북부인 부안읍, 동진면, 계화면, 행안면, 하서면, 상서면 동북부와 주산면 지역이다. 희안현(喜安縣)은 백제의 흔량매현(欣良買縣)으로 고려 때에 보안현(保安縣)으로 바뀌는데 지금의 부안군 남부인 보안면, 줄포면, 진서면, 변산면, 상서면 서남부 등이 해당한다. 그리고 상질현(尙質縣)은 백제의 상칠현(上柒縣)으로 고창군의 흥덕면, 성내면, 신림면과 부안읍 남부가 관할이다.

하지만 신라가 당나라 군을 축출하고 옛 백제 지역을 차지한 후에는 다시 새로운 ‘신라적 통치 질서의 확립’이 대두되면서 변화를 겪었다. 신라는 백제의 지방 중심지이자 저항의 거점인 주류성과 중방 고사성의 ‘백제적 유구성과 전통성’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변화시킬 필요성이 제기되었을 것이고, 그 결과 부안, 정읍, 고창, 김제를 아울러 전라북도 서부 지역을 관할하던 고사주를 대산군과 고부군으로 분할하면서 ‘백제 의식’의 변화와 변질을 의도하였던 것이다.

[백제인에 대한 처우]

통일 신라에서 백제인을 어떻게 대우하였는지를 알려 주는 자료가 673년(문무왕 13)에 제정된 관등 수여 기준표이다. 이것은 신라가 백제[660년]와 고구려[668년]를 멸한 뒤 어느 정도 안정되자 마련한, 백제 사람들에 대한 대우 조건을 규정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백제 사람들이 신라 사회에 편입될 때 받는 최고 관등은 10품 대나마였다. 신라에서 관등제와 신분제는 밀접한 관계를 갖는데, 대나마는 ‘서울 사람[王京人]’이면 5두품 출신자의 승진 상한선이었고, 지방인이면 진촌주(眞村主)는 5두품, 차촌주는 4두품의 대우를 받았다. 따라서 이 기준표대로라면 백제의 2품 관등 출신 중 특혜를 받아 신라 수도인 서라벌에 거주하더라도 진골은 고사하고 6두품도 아닌 5두품이나 그 이하 신분으로, 그리고 지방에 거주해도 5두품인 진촌주나 4두품의 차촌주의 신분이 된다는 뜻이다. 더군다나 8품~16품의 관등을 가진 백제 사람들은 그런 혜택도 받지 못하고 말이다. 이는 부흥 운동에 실패하고 신라에 완전히 병합된 패망국 백제 사람들에 대한 처우가 그다지 좋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반면에 백제 지역에 이주하여 보덕국을 세운 고구려 사람들에 대한 대우는 달랐다. 우선 보덕국의 고구려 사람들이 받은 신라의 최고 관등은 7품 일길찬으로, 백제 사람들보다도 3등급이나 높았다. 고구려 사람, 그것도 원 고구려 지역이 아니라 신라에 항복하여 옛 백제 지역 금마저[전라북도 익산]에 살면서 본국 관품 6위를 가진 사람들까지도 백제 사람들보다 한 단계 높은 6두품 신분이 되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신라가 백제 사람과 고구려 사람 사이에도 상당한 차별을 두었음을 보여 준다.

결국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 사람들을 차등적으로 대우하며, 전면적인 신라 사람으로 융합시킬 노력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삼국은 각각 지배층 사이의 신화나 제사 체계는 물론 언어라든가 행정 체계 등이 서로 달랐던 데다 적대감까지 누적되면서 동족이 아닌 경쟁 세력일 뿐으로, 신라 사람들은 백제와 고구려 사람들을 같은 민족이 아니라 피정복인으로 다스렸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라의 지배 아래에 들어간 백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 고구려는 멸망 이후 신라에 편입된 영토가 임진강 일대에 불과하였고, 또 사람 수도 백제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백제는 모든 영토와 주민의 대다수가 신라의 지배 하에 들어갔기 때문에 이들이 백제 사람이라는 의식과 전통을 어느 정도 가졌는지 생각해 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송고승전(宋高僧傳)』에는 진표(眞表)를 ‘백제 사람[百濟人]’이라고 기록하였다. 김제가 백제 영토였기 때문에 백제 고토(故土) 사람이란 뜻으로 풀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진표는 경덕왕(景德王)[재위 742~765] 때 활약하여 백제가 망하고도 100여 년이 지난 뒤의 사람이다. 더군다나 입당(入唐)한 적도 없는 그를 ‘백제인’이라 기록한 것은 아마도 스스로 백제 사람, 혹은 “본래 백제 사람[本百濟人]”이라 자처하였기 때문이며, 그것은 당연히 신라의 체제와 지배 방식에 대한 저항 의식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진표의 미륵 신앙은 미륵사로 대표되는 백제 미륵 신앙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 득도한 진표부안 변산으로 내려올 때 지역민들로부터 받은 환영은 더욱 흥미롭다. 진표를 열렬하게 환영한 사람들은 신라의 통치 아래 괴로움을 받았던 민중이지만 특히 백제 사람, 그중에서도 부안을 포함하는 고사주 일대 주민들의 환영이 대단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결국 백제의 유민으로서 스스로 백제 사람임을 강조하며 미륵보살의 대행자로 나타난 진표와 이를 열렬히 환영한 지역 주민들을 서로 결부시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신라로 병합된 지 100여 년이 흐른 시점에서도 백제의 정신은 면면히 흘렀고, 또 진표에 이르러 단순한 백제 전통의 계승뿐 아니라 백제의 정신적 부흥 운동으로 이어졌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비록 진표 때에는 단순한 신앙 운동으로 끝났지만 훗날 견훤(甄萱) 때에 이르러서는 현실적인 국가 부흥으로 구체화되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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