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176
한자 卵山里
영어공식명칭 Nansan-r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줄포면 난산리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용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연표보기 - 전라북도 부안군 건선면 난산리 개설
변천 시기/일시 1931년연표보기 - 전라북도 부안군 건선면 난산리에서 전라북도 부안군 줄포면 난산리로 개편
성격 법정리
면적 2.19㎢
가구수 128가구
인구[남/여] 189명[남 85명/여 104명]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줄포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난산리(卵山里)의 옛 이름은 건선(乾先)으로 원난산마을을 상징하는 건선루(乾先樓)가 마을의 풍치를 한껏 더한다. 「건선루기(乾先樓記)」에 “부풍지치남일사반사(扶風之治南一舍半舍)에 유촌왈난산(有村曰卵山)하니 구명건선야(舊名乾先也)라…….” 하고 새겨져 있다. 이를 통해 이 지역의 옛 이름이 ‘건선(乾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세가 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金鷄包卵)의 형국이어서 ‘알뫼[알미]’ 또는 ‘난산(卵山)’이라 이름하였다.

나머리[남월(南月)마을]는 조선 전기에는 산정뜸과 구전뜸으로 나뉘었는데 정유재란 때 왜적의 침입으로 폐촌되었다. 조선 후기 부안읍 옹정으로부터 전주 최씨(全州崔氏)가 이거하여 마을이 다시 형성되면서 남면리와 월성리가 되었다. 일제 강점기 목중리에 속해 남중동이라고 불리다가 광복 후 남면리와 월산리에서 각각 한 자씩을 따서 남월이라고 하였다. 왜적을 맞아 싸웠다는 울돌치[고개] 전설이 전한다.

[형성 및 변천]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부안군 건선면의 목상리, 목중리, 목하리, 남면리, 월출리, 신성리의 각 일부와 고부군 서부면의 마항리 일부를 병합하고 건선면 난산리로 개설하였다. 1931년 7월 건선면을 줄포면으로 개칭하였다.

[자연환경]

대부분 구릉성 평지 지역이며, 마을의 동쪽 경계를 따라 고부천이 남북으로 흐르고 하천 주변에 농경지가 넓게 펼쳐져 있다.

[현황]

난산리의 동쪽과 남쪽, 서쪽은 정읍시 고부면 백운리와 줄포면 신리, 북쪽은 줄포면 파산리와 접한다. 2020년 12월 31일 현재 면적은 2.19㎢이며, 원난산리·목상리·목중리·목하리·남월리의 5개 행정리에 128가구, 189명[남 85명/여 104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원난산마을은 뒤[서]로는 목중마을, 북으로는 목상마을, 남으로는 남월마을과 이웃하며 동으로는 드넓은 평야가 전개된다. ‘밀양 박씨 김동엽 열효지려(密陽朴氏金東燁烈孝之閭)’가 있다. 여(閭) 안에는 ‘증숙부인밀양박씨절행비(贈淑夫人密陽朴氏節行碑)’와 ‘제능참봉김공동엽효행비(齊陵參奉金公東燁孝行碑)’가 세워져 있다.

1789년(정조 13) 간행된 『호구 총수(戶口總數)』에는 건선면의 미영골을 목상리(木上里), 목중리(木中里), 목하리(木下里)로 나누어 기록하고 있다. 그 시대에 이미 마을 규모가 컸기에 상·중·하 세 마을로 나눈 것으로 여겨지는데, 200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다. 위성 사진으로 보나 지세로 보나 난산마을, 목중마을, 목상마을은 한 마을로 보이지만, 목하마을은 파산리 쪽으로 저만치 떨어져 있어 혼동하기 쉽다. 마을 이름에 ‘목(木)’ 자를 차입해 사용한 것은 일대의 지형이 나무 모양과 같다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는 설도 있고, ‘미영골[木花洞]’이 변화하였다는 설도 전한다. 미영골이 변화한 것이라면 목화동상리, 목화동중리, 목화동하리라고 하는 것이 타당한 듯한데, 아마도 줄여서 목상리, 목중리, 목하리라 한 듯하다. 목하마을은 행정리 명인 ‘목하리’ 대신 마을 입구 표지석이나 마을 회관 등에 유독 ‘미영골’, 또는 ‘목화마을’을 강조하고 있다. ‘목화’는 부안 지방 말로 ‘미영’이니, 예쁘고 의미 깊은 이름이다.

목상마을 입구 표지석에서 파산 방면으로 약 400m 지점 왼편에 ‘고부 이씨 세천(古阜李氏世阡)’이라 새긴 커다란 표지석이 있다. 표지석 안에는 이협(李峽)과 이만록(李萬祿)의 효자 정려가 있고, 고부 이씨 재실인 부약재(孚禴齋)가 있다. 부약재는 간재(艮齋) 전우(田愚)[1841~1922]가 1908년(순종 2) 왕등도로 떠날 때까지 머물던 은신처이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친일파의 자객간인(刺客奸人)이 횡행, 신변에 위기가 닥칠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하자 전우의 문인들이 그에게 여러 차례 피신할 것을 권하였다. 이에 부득이하게 당시 은신 중이던 충청도 천안군 광덕면 매당리 쇠골의 태화산록 움막에서 이곳으로 남행하였다. 전우를 초청한 이는 목상마을 이시택(李時澤)으로 전우의 문인이었다. 전우는 목상마을로 내려와 고부 이씨(古阜李氏)[영주 이씨] 재실을 수리하여 거처와 강당으로 활용하였는데 당시 조상의 은덕에 감사하며 춘추 제사를 모시는 재실이라는 뜻의 ‘부약재’라는 새 재실 이름을 지어 주고, 친필 액자를 각자하여 걸도록 하였다. 전우는 이 시기 들판 저쪽에 우뚝 서 있는 고부의 두승산에도 올라 바위에 ‘망화대(望華臺)’라고 새겨 넣기도 하였다.

부약재 바깥마당의 이협과 이만록의 효자 정려에는 ‘효자통정대부첨지중추부사이협지려 상원을유십이월일명정(孝子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李埉之閭上元乙酉十二月日命旌)[1885년]’과 ‘효자동오처사이만록지려 당우이십삼년병술십일월일명정(孝子桐塢處士李萬祿之閭當宇二十三年丙戌十一月日命旌)[1886년]’이 나란히 걸려 있다. 「이협 정려기」는 전우가, 「이만록 정려기」는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1789~1879]이 썼다. 이협은 고부 사람으로 목상마을에서 태어나 부모를 섬기는 데 정성을 다하므로 조정에서 정려와 함께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증직하였다. 이만록은 효성이 지극하고 행의가 뛰어나 고을에서 조정에 그의 효행을 아뢰니 효자의 정려를 내렸다고 한다.

남월마을은 북으로 원난산마을과 나란히 자리한다. 옛날에는 마을 앞까지 조수가 드나들어 바다에서는 고기를 잡고, 또 기름진 농토에서는 농사를 짓는 풍요한 마을이라 하여 ‘생거남월(生居南月)’이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전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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