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173
한자 壯洞里[茁浦面]
영어공식명칭 Jangdong-ri[Julpo-myeon]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줄포면 장동리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용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연표보기 - 전라북도 부안군 건선면 장동리 개설
변천 시기/일시 1931년연표보기 - 전라북도 부안군 건선면 장동리에서 전라북도 부안군 줄포면 장동리로 개편
성격 법정리
면적 3.69㎢
가구수 169가구
인구[남/여] 284명[남 147명/여 137명]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줄포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장동리(壯洞里)부령 김씨(扶寧金氏) 큰아들[장자]이 살았다고 하여 장잣골 또는 장동(壯洞)이라 하였다는 설과 장자골[壯子谷]에서 유래한 지명이라는 설, 임진왜란 당시 인근 각처에서 훈련을 받고자 수많은 장사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골짜기를 가득 채웠는데 임진왜란 후 장사들 일부가 남아 마을을 형성하면서 장잣골로 불리게 되었다는 설이 전한다.

남생이등[연정(蓮汀)마을]은 줄포면 소재지에서 북으로 줄포-고부-정읍으로 통하는 도로 2㎞ 지점인 서해안 고속 도로 줄포 나들목 부근에 자리한다. 마을 앞에 연(蓮) 방죽이 있어 연꽃이 만발할 때면 마을의 운치를 한껏 더했다는데, 마을 지세가 연꽃 밑에서 노는 남생이 형국이어서 남생이등이라고 하였다.

각동마을은 지세가 잠복한 ‘용의 뿔’ 형국이어서 각골[角洞]이라 이름하였다고 전한다.

[형성 및 변천]

1914년 이전에는 부안군 건선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건선면의 연정리, 원동리, 신기리, 대연동, 각동, 화전동, 사거리의 일부를 병합하고 건선면 장동리로 개설하였다. 1931년 7월 건선면을 줄포면으로 개칭하였다.

[자연환경]

줄포면의 주산인 천대산[천배산]이 동쪽과 서쪽, 북쪽을 둘러싸고 있다.

[현황]

장동리의 동쪽과 남쪽, 서쪽은 줄포면 파산리신리, 줄포리, 북쪽은 보안면 영전리, 줄포면 대동리와 접한다. 2020년 12월 31일 현재 면적은 3.69㎢이며, 원장동리·원동리·연정리·각동리의 4개 행정리에 169가구, 284명[남 147명/여 137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천대산의 정상을 원형으로 감은 삼국 시대 토루 성지인 장동리 토성(壯洞里土城)이 있다. 실측 결과 토루 둘레는 325m, 외사면 길이 약 7m, 내사면 길이 약 4m, 토루면 너비 1.2m 내외이며, 내면에는 너비 8~9m의 회랑이 있다. 이곳 성터에서는 삼국 시대 토기 조각, 기와 조각 등이 발견되었는데, 고려 시대에 개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천대산 동쪽 자락에 있는 원장동(元壯洞)마을은 부안 김씨(扶安金氏) 해옹(海翁) 김홍원(金弘遠) 일가가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김홍원이 정착한 후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의 할아버지인 유성민에게 우반동 동변 일대를 사들이고, 손자 김번 대에 우반동으로 이거하여 지금의 우동리 부안 김씨 집성촌을 이루었다. 천대산 동남 기슭에 김홍원의 묘와 신도비, 재실인 이례재(以禮齋)가 있다.

원동(院洞)마을의 원래 이름은 원골이다. 서로는 장성, 서북으로 원장, 동으로는 화전, 남으로는 십리동마을에 둘러싸인 마을로 줄포 시내로부터 1㎞ 지점에 있다. 예전에는 마을 앞 대포들까지 조수가 드나들었다고 하며, 마을 동쪽 100m 지점의 옛길은 예전에 고부와 흥덕으로 통하는 대로였다고 한다. 마을 뒷등의 토끼재에 있던 서숙(書塾)에서 두 고을 원님들이 쉬어 갔다고 하며, 이곳을 지나는 많은 유생들도 이곳에서 유숙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이 마을에 조선 시대 역원(驛院)의 하나인 수세원(手洗院)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각동마을은 줄포면 소재지에서 북으로 줄포-고부-정읍으로 통하는 도로 700여 m 지점에 자리한 줄포 시내권 변두리 마을이다. 예전에는 마을 앞까지 조수가 드나들었으며, 임진왜란 때 각지에서 모여 든 피난민들이 갈대 무성한 저지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지으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되었고, 줄포항이 번성함에 따라 더욱 큰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영월 신씨(寧越辛氏) 재각인 춘원장(春園莊)이 있으며, 마을 중앙의 꽃나무정은 일제 강점기 일본 사람들이 꽃나무와 채소를 많이 재배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에 터를 잡은 일본 사람들은 이 마을 일대는 물론 대동리 일대 농장을 관할하였으며, 인근 주민들은 이곳 농장에서 노무자 생활을 했다고 한다.

연정마을에는 조선 후기까지 남생이등방이라는 여관이 있었는데, 방의 크기가 장정 100여 명이 합숙할 수 있는 크기여서 인근 부안, 정읍, 고창은 물론 서울에서도 알고 찾아올 정도로 유명하였다고 전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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