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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1317
한자 滿船-安全-祈願-蝟島-大猪項-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승연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 대리에서 정월 초사흗날 마을의 평안과 풍어를 비는 마을 공동 제의.

[조기의 황금 어장 칠산 바다의 중심이었던 위도(蝟島)]

“칠산 바다로 돈 벌러 가자”, “황금 같은 조기떼가 코코마다 걸렸구나”라는 뱃사람들의 노랫말 속에는 조기잡이가 한창이던 시절 칠산 바다의 풍경이 잘 드러나 있다. 흑산도, 연평도와 함께 조기의 황금 어장으로 명성을 날렸던 칠산 바다는 영광 법성포에서 위도, 변산, 고군산 군도에 이르는 해역을 말한다. 위도 앞바다가 그 칠산 바다의 중심이었다. 봄철에 조기떼가 서해로 북상하기 시작하면 만선의 꿈을 안고 팔도의 조기잡이 배들이 조기떼를 따라 칠산 바다에 모여들었다. 곡우사리에 칠산 바다에서 잡힌 조기는 최상품으로 전국에 팔렸다.

이처럼 칠산 바다에 조기가 넘쳐나던 시절 고깃배가 육지까지 가닿을 시간이 없어서 해상 어시장인 ‘파시(波市)’가 위도에 형성되었다. 4월 초순에서 하순까지 한 달 이상 파시가 열릴 때면 어선과 선원들로 작은 섬 위도가 일시에 흥성거렸다. 서해안 최대의 조기 파시였던 위도 파시는 1920년대 전후까지 형성되었고, 1970년대까지도 명맥이 이어졌다. 하지만 조기잡이가 쇠퇴하고 삼치잡이마저 어렵게 되자 위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위도의 여러 마을에서는 오늘날에도 해마다 풍어와 무사고를 기원하는 당제와 용왕제가 행해지고 있다. 그중 위도 띠뱃놀이로 알려진 대리(大里)위도의 서편 끝에 위치한다. 위도 앞바다에서도 풍부한 어장이 형성되어 있어서 큰 마을을 이룬 대리 마을은 큰 돼지의 목 형국이라고 해서 ‘대저항(大猪項)’이라 일컬었다. 대저목, 대돝목, 대돌목 등으로 불렸고, 후에 ‘대장’으로 변모했다가 ‘대리’로 바뀌었다. 위도 띠뱃놀이는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대리 마을 어민들이 풍어와 안전을 기원하는 마을굿으로, 대리 사람들은 오늘날까지 이 전통을 지켜 나가고 있다.

[대리 원당의 열두 서낭에 소원을 빌었던 뱃사람들]

변화무쌍한 바다에서 생업을 이어가는 어부들은 항해 안전과 풍어를 절대적 존재에게 기원해 왔다. 대리 사람들은 열두 서낭을 모신 대리 원당에서 매년 음력 정월 초사흗날 항해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며 제를 지냈다. 칠산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당제봉 정상에 있는 ‘원당(願堂)’은 말 그대로 소원을 비는 당이다. 대리 원당은 대리 주민뿐만 아니라 칠산 어장을 오가는 원근의 어부들도 잠시 배를 멈춰 간단한 제사를 지내거나 절을 하고 갔다고 할 정도로 영험한 당으로 유명했다. 1900년에 쓰인 「원당중수기(願堂重修記)」에 황해도 옹진과 추자도 사람까지도 원당 중수에 비용을 댔다는 내용이 나오는 것을 보면 원당의 영향력이 상당히 멀리까지 미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원당 당집은 1987년에 신축되었다.

대리 원당에는 열두 서낭이 좌정하고 있다고 하는데 실제 당집 안에 모셔진 신위는 열둘이 아니다. 당집 정면에는 옥저 부인, 본당 마누라, 원당 마누라, 손님네 네 서낭이, 오른쪽 벽면에 장군 서낭과 산신님, 좌우 문짝에 문수영 대신의 신위가 있어 모두 팔 서낭이다. 예전에는 애기씨와 물애기씨도 있어서 열 서낭이었다. 원당의 서낭은 각각 역할이 있어서 산과 마을과 바다를 관장하며 고기잡이를 돕고, 배의 해상 안전과 마을의 평안을 지켜 주며, 무병장수를 담당한다. 열두 서낭신의 내력이나 신격에 대해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원당에서 가장 큰 신은 원당 마누라와 본당 마누라로 보인다. 1년 동안 배에 모실 배서낭으로 점지되는 서낭은 원당, 본당, 장군, 애기씨, 옥저 부인으로 여서낭이 많다.

원당에서 무녀는 징과 장구 반주로 성주굿을 시작으로 산신굿, 손님굿, 지신굿, 서낭굿 세 거리, 깃굿, 문지기굿 순으로 아홉 거리의 원당굿을 한다. 옛날에는 ‘열두 거리’ 굿을 했다고 하나 실제로 행해지는 것은 아홉 거리이다. 무녀가 당집 안에서 굿을 하는 동안 원당에 올라온 일행은 바깥에서 모닥불을 피워 돼지고기를 구워 먹고 술을 마시며 구경을 하고, 굿거리 사이사이에는 풍물패가 풍물을 치기도 한다.

어부들이 가장 관심을 갖는 굿거리는 배서낭을 내림받는 깃굿이다. 깃굿에서 무녀는 어부들에게 산점(算占)을 쳐주는데 산쌀[算米]이 짝수가 되면 선주가 그 서낭을 배서낭으로 내림받는 것이다. 이때 내림받은 서낭 이름과 배의 이름을 한지에 써 주는데 이것을 ‘깃손’이라고 한다. 과거에는 뱃기[오폭기] 꼭대기에 깃손을 묶은 채로 들고 선주 집까지 달려 내려와 마당에 세워 두고 간단한 서낭맞이 의례를 행하기도 했다. 대리 어부들은 내림받은 서낭을 한 해 동안 자기 배의 신주로 모시고, 서낭의 성격에 맞춰 좋아할 만한 물건이나 제물을 바치며 어부들이 바다에서 조업하는 동안 배와 선원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였다.

[춤과 노래와 공물을 바치며 용왕에게 풍어와 안전을 비는 용왕제]

대리 원당제가 끝나면 사해용왕에게 바치는 용왕제가 이어진다. 원당제와 용왕제는 대리 마을굿의 핵심 제의이다. 용왕제는 무녀의 용왕굿에 이어, 마을 주민들이 마을의 평안과 풍어를 기원하며 「술배 소리」, 「에용 소리」, 「가래질 소리」 등 농악에 따른 노래와 춤이 어우러진다. 춤과 노래와 농악은 사람들의 기원이자 여흥이며, 또 한편으로는 용왕을 기쁘게 하기 위해 바치는 의식과도 같다. 원당제가 열두 서낭을 위하는 제의 중심이었다면, 용왕제는 사해용왕을 위한 제의이면서 사람들의 흥겨운 축제이기도 하다.

풍어와 만선, 해상 안전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열두 서낭과 사해용왕에게 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액막이를 철저히 해야 한다. 용왕제 끝에 액운을 담은 띠배를 먼바다에 떠나보내는 것도 일종의 액막이이다. 또 바다에서 불귀의 객이 되어 수중에 잠든 가족이나 조상이 있는 집에서 수중고혼을 위한 상을 용왕제 때 차려 내놓는 것도 액막이이다. 사고로 수중에 떠도는 혼은 자칫 잘못 대접하면 액운을 가져올 수 있기에 잘 먹이고 달래어 보내야 한다. 그래서 수사자(水死者)가 있는 집의 부녀자들은 수사자를 위한 허드렛상을 내와서 수중고혼을 달래는 것이다. 무녀는 용왕굿을 한 다음에 수사자들을 들먹이며 아무개도 잘 먹고 가라고 굿을 한다.

용왕굿이 끝나고 띠배를 바다에 보내기 전에 다시 한번 줄밥을 뿌리며 액막이를 한다. 줄밥 뿌리기는 바다에 나가 수중고혼이 된 이들과 무주고혼이 된 이들에게 음식을 고루 풀어먹인다는 의미이다. 줄밥은 가래밥이라고도 하는데, 밥에 뜸부기 등의 해초와 콩을 섞어 만든 것이다. 바다의 혼을 달래는 것은 주로 여성들의 몫이었고, 무녀와 마을 부녀자들이 주축이 되어 해안가를 돌면서 줄밥을 바가지로 떠서 바다에 뿌린다. 위도의 다른 마을에서도 당제 때 수중고혼이나 잡귀를 먹이기 위해서 제당이나 바다에 제물을 뿌리거나 던지는 의식을 행한다. 다른 마을에서는 이를 ‘산물’ 또는 ‘퇴송’이라고 한다.

줄밥 뿌리기를 할 때 풍물패와 소리꾼들이 부녀자들과 동행하는데 앞소리꾼이 「가래질 소리」, 「에용 소리」, 「술배 소리」 앞소리를 메기면, 부녀자들이 함지박에서 줄밥을 퍼서 바다에 뿌리면서 뒷소리를 받는다. 용왕제는 이처럼 원당에 올라가지 않았던 마을 사람들도 모두 다 나와서 춤과 노래와 농악으로 함께 어우러져 신명을 돋우는 축제판이 되고, 띠배를 띄워 보낼 즈음이 되면 분위기가 한껏 고조된다.

[모든 재액을 담고 멀리 떠나가는 띠배]

용왕제 마지막 절차는 제물과 허세비[‘제웅’, ‘허수아비’ 등이라고도 함]를 담은 띠배를 모선이 끌고서 먼바다로 나가 띄워 보내는 것이다. 액운을 가져가는 상징물인 띠배를 띄워 보내는 풍습은 마을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서해안 풍어제에서 보편적으로 볼 수 있다. 용왕굿을 하고 나서 띠배를 띄워 보내기 때문에 대리 현지에서는 ‘띠뱃굿’이라 불렀지만 ‘띠뱃놀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985년 2월 1일 위도 띠뱃놀이가 국가 무형 문화재 제82-3호로 지정되면서 ‘띠뱃놀이’라는 대표 명칭이 굳어지게 되었다.

띠배는 띠풀[茅]로 만든다. 띠풀을 재료로 써야 좀 더 정교한 띠배를 만들 수 있지만 요즈음은 띠풀이 귀해져서 구하기 쉬운 억새풀로 만들고 있다. 띠배는 길이 3m쯤 되게 크게 만들며, 가마니로 돛도 만들어 세운다. 바다에 띄우기 전에 용왕제 지낸 제물을 띠배에 싣는데, 제물 실은 띠배는 용왕님께 바치는 공물인 셈이다. 마을의 액을 몰아가라고 미리 만들어 마을에 세워 두었던 허세비도 거두어 띠배에 싣는다. 허세비는 이물사공, 고물사공, 뱃동무, 허드렛일 사공, 화장 등 일곱 동무를 만들었지만 지금은 오방장군 식으로 다섯 개를 만든다. 허세비는 남근을 과장해서 표현하는데,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성 신앙을 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띠배는 모선에 이끌려 호위선들과 함께 바다로 나가는데, 이때 모선과 호위선 등에 탄 마을 사람들은 농악을 치며 「술배 소리」, 「가래 소리」, 「배치기 소리」 등을 흥겹게 부른다. 흥겨운 뱃노래가 바다에 퍼지고 호위선들이 뱃기를 휘날리며 마을 앞바다로 띠배를 이끌고 나아간다. 액을 담은 상징물인 띠배가 마을로 다시 돌아오는 일이 없어야 한다. 띠배가 멀리 가서 바다 한가운데 잘 가라앉으면 용왕에게 잘 전달된 것이라 믿는다. 마을에 남은 사람들은 마을의 재액을 모두 싣고 떠나가는 띠배를 향해 풍어와 무사고, 마을의 평안, 그리고 저마다의 소원을 빌며 한 해가 무탈하기를 기원한다.

[위도 띠뱃놀이의 현재와 미래]

위도가 조기의 황금 어장으로 명성을 날리던 시절, 대리 외에도 위도의 여러 마을에서 풍어제가 성대하게 행해졌지만, 오늘날에는 명맥이 끊기거나 간소하게 지내고 있다. 1985년에 국가 무형 문화재로 지정된 위도 띠뱃놀이는 보존회를 중심으로 전승을 이어가고 있으나, 사회·경제·환경의 문제에 직면해 있어 지속적 전승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하다. 원당굿과 용왕굿을 주관해온 무녀는 위도에 살았던 세습무였으나 무녀가 사망한 후 타지의 무녀를 초청하여 굿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섬 주민의 감소와 고령화로 전승자를 확보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무엇보다 새만금 방조제 공사 이후 위도 앞바다의 해양 생태 환경이 바뀌고 어장이 황폐화하면서 위도 어민들이 경제적 타격을 입고 있다. 조기의 황금 어장이었던 칠산 바다에 수백 척의 어선들이 몰려들고 삶이 풍요로웠던 지난날의 위도는 이제 옛 영화로 남았을 뿐, 어장이 죽으니 어민의 삶도 활기를 잃어가고 있다. 고기가 잡히지 않는 섬에서 매년 풍어와 안전을 기원하는 띠뱃놀이는 국가의 문화재 보조에 기대어 어렵게 전승을 이어가고 있다.

삶의 변화를 맞은 위도에서 띠뱃놀이가 전통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전승을 지속할 방안이 무엇인지 모색해 나갈 필요가 있다. 전통 마을 신앙의 문화유산적 가치와 외부 관광객에게 개방적인 관광 자원의 가치를 조화시켜 나가면서, 학교 교육이나 지역 사회와 연계하여 전승의 자구책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 무엇보다 황금 어장으로 통했던 위도의 환경과 어장이 회복되어야 띠뱃놀이 전승이 온전히 지속될 수 있다. 건강하고 풍요로운 삶의 터전이 확고하게 자리잡을 때 위도 띠뱃놀이가 형식적이고 의무적인 전승에 그치지 않고 어촌의 생활 양식을 담은 살아 있는 문화 자산으로 미래에도 지속 가능해진다. 번영과 풍요가 위도에 도래하기를 기원하는 위도 사람들에게 모든 재액을 멀리 가져가는 띠배의 상징처럼 위도의 건강한 삶을 위협하는 문제를 멀리 떠나보내는 띠배의 주술적 힘이 절실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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