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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1305
한자 李奎報-南行月日記-邊山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하태규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을 배경으로 고려 후기 문신 이규보가 남긴 일기 형식의 기행 수필.

[개설]

이규보(李奎報)[1168~1241]는 고려 후기 문신 관료이자 대문호이다.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운 거사(白雲居士)·지헌(止軒)·삼혹호 선생(三酷好先生)이다. 벼슬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경전(經典)과 사기(史記)와 선교(禪敎)를 두루 섭렵하였고, 호탕 활달한 시풍은 당대를 풍미하였으며 명문장가였다. 저서에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백운소설(白雲小說)』 등이 있다.

[이규보 전주목 사록 겸 장서기가 되어 「남행월일기」를 남기다]

이규보는 과거에 급제한 지 10년 만인 1199년(신종 2) 32세의 나이로 처음 관직에 올라 전주목의 사록 겸 장서기(司錄兼掌書記)에 임명되어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고려 시대 전주는 그 자체로 하나의 고을이었지만, 금마군(金馬郡)을 비롯한 12개의 속군현을 거느리는 주현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 전라북도 지역에 해당하는 전라도 46개 고을을 관할하는 계수관(界首官)으로 지방 행정의 중심지였다.

이규보가 맡은 사록 겸 장서기라는 관직은 사록(司錄)과 장서기(掌書記)를 겸하는 관직이었다. 사록이란 관직은 목·도호부·유수관에 파견한 정7품 관직으로 임무는 광범위하여 반란 진압, 도적 체포, 호랑이 사냥 등 군사 임무, 사역, 향리 관할과 행정 관리, 속군현의 순찰, 제사, 사신 접대 등 폭넓은 임무를 수행하였다. 장서기는 7품 지방 관직으로 문부와 기록을 맡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대체로 사록이 겸하였다.

이규보가 전주로 내려온 것은 1199년 9월이었다. 『동국이상국집』에 의하면 9월 13일에 개성을 떠나 전주로 갈 때 임진강 배 위에서 진공도, 한소와 작별하면서 시 한 수를 지었으며, 9월 23일 전주로 들어가면서 마상에서 회포를 읇은 시 한 수를 지었다. 전주에 부임한 이규보는 이듬해 12월 파직 당할 때까지 약 1년 3개월 동안 전주에서 관리로 여러 가지 업무를 수행하면서 관내 속군현을 두루 유람하였다. 조정의 명으로 변산(邊山)에서 작목사로서 벌목을 감독하는 일을 하기도 하고, 관내 구역을 순행하면서 원옥(冤獄)을 살피기도 하였으며, 관내 바다의 배를 조사하고 수촌(水村)·사호·어등·염시를 유열하였다.

이규보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전주의 소군현 지역은 물론 관내 영군현과 그 군현 지역을 돌아다니며 순찰, 지휘 감독하고 유람하였다. 이규보는 이 과정에서 보고 들은 일들을 그때그때 짤막하게 기록해 두었는데, 1201년 3월에 이를 정리하여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라는 한 편의 글로 남겼다. 이 글은 『동국이상국집』 권23과 『동문선』 권66에 수록되어 있다.

「남행월일기」는 이 글을 쓰게 된 이유와 목적을 밝힌 머리글, 전주 일대를 여행하면서 견문한 것을 기록한 본문, 견문 기록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맺음글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규보는 머리글과 맺음글에서 사방을 유람하면서 얻은 기이한 견문들을 시문으로 채집해 두었다가 노년에 다시 더듬으며 회포를 풀 자료로 삼고자 한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본문에서는 전주목을 중심으로 주변 일대를 편력한 내용을 기록하고 자신의 감흥을 덧붙였다. 전주목에 부임하던 해에는 바쁜 공무 중에 하루는 휴가를 이용하여 경복사의 비래방장을 찾아보았고, 1199년 11월에 전주 속군의 민정을 살피기 위해 마령·진안·운제·고산·예양·낭산·금마·이성을 순방하였으며, 12월에 벌목하는 일을 감독하러 변산에 들어갔다. 윤 12월에는 원옥을 감찰하기 위해 진례·남원을 돌아왔다. 이듬해인 1200년 3월에는 어선을 조사하기 위해 만경·임피·옥구·장사·무송을 차례로 방문하였으며, 8월에는 변산 소래사를 다녀왔다.

이규보는 날짜 별로 자신이 들린 지역과 여행 계기, 여행지의 자연·풍토·풍속, 역사·지명·설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재를 다루었다. 또 시나 대화를 적절하게 활용하여 자유로운 형식으로 생동감 있게 서술하였다. 이에 따라 이규보「남행월일기」는 고려 시대의 전라도 지방의 사회와 문화를 연구하는 귀중한 역사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고려 지방 군현의 운영과 지방관의 역할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규보 작목사로 여러 차례 변산을 왕래하다]

이규보는 전주목 사록 겸 장서기로 있으면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변산을 여러 차례 왕래하였다. 1199년 12월 조정의 명령에 따라 보안현(保安縣)에 있는 변산에서 벌목하는 일을 맡아보게 되었다. 변산은 고려 시대 보안현에 속해 있었다. 『고려사(高麗史)』 지리지에 의하면, 원래 고려 전기 지방 통치 체제상 부령(扶寧)과 보안(保安)은 고부군의 속현이었다. 하지만 부령에 감무를 설치하여 보안을 겸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보안은 다시 부령 감무의 지휘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규보변산을 왕래할 때에는 부령을 경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동국이상국집』에는 이규보가 부령 객사에서 판상(板上)에 있는 좨주 이순우(李純佑)의 시에 차운하여 지은 시 한 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어느 때 지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사실 변산은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재목 창고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고려 시대에도 궁실(宮室)을 수리하고 영건하기 위해 해마다 재목을 베어내지만 아름드리 나무와 치솟은 나무는 항상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규보가 벌목하는 일을 항시 감독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이규보를 ‘작목사(斫木使)’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규보는 작목사로 나가는 것이 상당히 못마땅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자신이 맡은 일이 담부(擔夫)[짐꾼]나 초자(樵者)[나무꾼]의 일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규보변산으로 가는 길에 그러한 마음을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나타냈다.

권재옹군영가타(權在擁軍榮可詫)[호위군 인솔하니 영광을 자랑할 만하지만]/ 관호작목욕감지(官呼斫木辱堪知)[작목관이라 부르니 수치스럽기만 하네]

「남행월일기」에는 이규보가 1199년 12월에 변산에 나갔던 일을 기록하고 있지만, 그가 다녀간 지역이나 견문에 대하여는 기록하지 않았다. 그가 변산으로 들어간 노정은 안천에서 쌓인 눈을 구경하고, 견포에서 안장 풀고 조수 물러가길 기다린다는 대목으로 보아 안천, 견포를 경유하여 변산으로 간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안천, 견포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이상이 「남행월일기」에 기록한 이규보가 작목사로 부안에 처음 왔던 일을 기록한 내용이다.

이규보가 다시 변산에 간 것은 1200년 정월이었다. 이규보는 1199년 윤12월 정미에 조정의 명을 받아 각 고을의 원옥을 감찰하기 위해서 진례현으로 떠나 남원부 등을 돌아온 것으로 나타난다. 그 뒤 이규보는 1200년 정월에 변산을 다시 찾았다. 정월 19일에 다시 부령군(扶寧郡)에 이르러 시한 수를 지었다. 이 때에 이규보가 작목사로서 변산에 들렸는지 아니면, 앞서 시작한 고을의 원옥을 감찰하기 위해서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동국이상국집』에 이때 지은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왕팔천여보지(來往八千餘步地)[팔천여 보의 거리를 내왕하고]/ 지휘사십육주군(指麾四十六州軍)[사십육주의 군사를 지휘했네]

앞서 전년 12월 이규보는 목재 벌목을 감독하는 일로 변산을 다녀갔다. 「남행월일기」에 의하면 그가 변산의 모습을 처음 본 것이 정월 임진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때의 변산 기행에 대하여는 주로 변산의 경관이나 자신이 바닷가에서 겪은 일을 기록하고 있다.

이규보변산으로부터 대나무 숲을 질러 내려가 평탄한 길을 만나 그길로 가서 보안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이 조수를 알지 못하고 행동했다가 곤경에 처했던 일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이규보는 다시 1200년 3월에 주사포에 들렀다. 「남행월일기」에는 이규보변산을 거쳐 보안을 들렀던 일을 기록한 다음에, 주사포에 들러서 시 한 수를 지었던 일화를 기록하고 있다. 그 내용을 언뜻 보면 이규보변산에 작목사로 오기 전에 들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은 1199년 12월 보안에 들렀을 때가 아니다.

『동국이상국집』 부록에 이 때 이규보가 주사포에 들렀을 때 지은 시가 삼월(三月)에 또 「보안현 강가에 이르러 벌목을 독려하다」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면 이 때에도 이규보가 벌목을 감독하기 위한 업무로 변산에 들렀음이 확인이 된다. 그런데, 그 시의 한 구절을 보면,

일춘삼과차강두(一春三過此江頭)[한 해 봄에 세 번이나 이 강가를 지나니]/ 왕사하증원미휴(王事何曾怨未休)[왕사가 어찌 이렇게도 쉬지 못하게 하는고]

라고 하여 한 봄에 세 번 이 강가를 지난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번이 세 번째 변산에 들렀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본다면 이규보는 전주목 사록으로 있으면서 작목사의 책임을 맡아 세 차례 이상 변산을 다녀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남행월일기」에 이때에 변산을 유람한 내용은 그렇게 많이 나타나지 않는다. 처음 그가 변산에 이르러서 경험했던 일들만이 수록되어 있고, 주사포에서 시를 지었다는 내용만이 수록되어 있다. 변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기록되지 않은 것은 시에 표현한 대로 바쁜 벌목 작업으로 변산의 다른 지역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반면, 그가 변산에 왕래하는 과정에서 지었던 시들이 『동국이상국집』에 다수 남아 있다.

[1200년 8월 변산에 다시 와서 유람하다]

이규보는 1200년 3월부터 바다를 따라 배를 조사하면서 수촌·사호·어등·염시를 유열하였다. 그 뒤 8월에 다시 변산을 찾아 소래사(蘇來寺), 원효방(元曉方), 불사의방장(不思議方丈) 등을 유람하였다. 1200년 8월 19일 이규보는 먼저 변산 소래사에 들렀다. 소래사는 오늘날 내소사(來蘇寺)를 말한다. 내소사 벽 위에 고 자현 거사의 시가 있으므로 이규보도 2수를 화답하여 벽에 썼다고 한다.

다음날인 8월 20일은 이규보의 부친 기일이었다. 이날 이규보는 부령현령(扶寧縣令) 및 다른 손님 6~7명과 더불어 원효방에 이르렀다. 원효방변산개암사 뒷산인 능가산 정상부 울금 바위 오른쪽 험한 바위 절벽에 위치하고 있다. 이규보는 이곳에서 원효방을 둘러보고 장문의 시를 지었는데 지은 시가 역시 『동국이상국집』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이규보「남행월일기」원효방과 그 곁의 ‘사포성인(蛇包聖人)’이란 이가 옛날 머물던 곳이라고 전해오는 설화를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규보원효방을 둘러본 뒤 다시 신라 중기 진표 율사(眞表律師)가 수행하던 불사의방장을 찾아서 구경하였다. 불사의방장변산의 주봉인 의상대 절벽에 있어서 험준하기로 이름난 암자였다. 「남행월일기」에는 절벽 꼭대기로부터 나무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방장(方丈)[고승이 거처하는 처소]으로 가는 과정이 실감나게 기록되어 있으며, 진표 율사의 행적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동국이상국집』에는 이규보불사의방장을 둘러보고 지은 시 한 편이 수록되어 있다.

불사의방장을 구경한 이규보는 망해대에 올라 부령현령이 주재한 술자리에 참석하여 아름다운 바다의 경치를 바라보며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즐기다 돌아왔다. 이때 동석한 10여 명이 다 취하였는데, 자신의 선군(先君)[남에게 돌아가신 자기 아버지를 이르는 말]의 기일(忌日)이므로 관현(管絃)과 가취(歌吹)만이 없을 뿐이었다고 기록하였다. 이규보는 이틀 동안의 변산 유람에서 소래사, 개암사 뒤편의 원효방, 그리고 의상봉 정상에 있는 불사의방장 등 사찰과 고승들의 자취가 어려있는 유적을 찾아서 유람하면서 아울러 변산의 천혜의 경관을 만끽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천혜의 경관과 역사가 어우러진 변산]

변산의 주봉은 의상봉으로 높이는 508m이다. 예로부터 능가산, 영주산, 봉래산이라 불렸으며 호남의 5대 명산 중 하나로 꼽혀 왔다. 서해와 인접해 있고 호남 평야를 사이에 두고 호남 정맥 줄기에서 떨어져 독립된 산군을 형성하고 있다.

변산반도는 내부의 남서부 산악 지대를 내변산, 그 바깥쪽 바다를 끼고 도는 지역을 외변산이라고 부른다. 이규보는 이러한 변산의 경치에 대하여 “변산은 나라 재목의 부고(富庫)이다. 소를 가릴 만한 큰 나무와 찌를 듯한 나무 줄기가 언제나 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층층의 산봉우리와 겹겹의 산등성이가 올라가고 쓰러지고 굽고 퍼져서, 그 머리와 끝의 둔 곳과 밑 뿌리와 옆구리의 닿은 곳이 몇 리나 되는지 알지 못하겠으나, 옆으로 큰 바다를 굽어보고 있다.” 하였다. 또, “층층한 봉우리와 겹겹한 멧부리가 솟았다 엎뎠다 구부렸다 폈다 하여, 그 머리나 꼬리의 놓인 곳과 뒤축과 팔죽지의 끝난 곳이 도대체 몇 리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옆에 큰 바다가 굽어보이고 바다 가운데는 군산도(群山島)·위도(蝟島)·구도가 있는데, 모두 조석으로 이를 수가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내변산 지역에는 기암 절벽으로 이루어진 중층의 산봉우리와 직소 폭포, 울금 바위, 봉래 구곡(蓬萊九曲)·분옥담·선녀당·가마쏘·용소·옥수담, 낙조대 등 경관이 뛰어난 명소들이 즐비하고, 우금산성(禹金山城)을 비롯하여 구암리 지석묘, 반계 유적(磻溪遺蹟) 등의 역사 유적, 불사의방장, 원효방, 내소사·개암사, 월명암 등 유서 깊은 불교 사찰과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이 중에 이규보가 직접 유람한 곳은 내소사개암사의 뒤편 꼭대기에 있는 원효방, 의상봉 꼭대기 절벽의 불사의방장과 산 정상의 망해대였다.

외변산 해안 지역에는 해식 단애의 절경을 이루는 채석강·적벽강, 고사포(古沙浦), 격포 해수욕장 등이 있다. 이규보가 부안을 왕래하면서 해안 지방의 절경을 감상하지 않고 지나갔을 리는 없지만 구체적인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 이러한 천혜의 경관과 역사 유적을 간직한 변산반도는 1971년 12월에 전라북도 도립 공원으로지정되었다가, 1988년 6월 11일에 국립 공원으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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