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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365
한자 壬辰倭亂
영어공식명칭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이칭/별칭 도자기 전쟁,조일전쟁,임진전쟁,분로쿠의 역,만력조선전쟁,만력조선지역,항왜원조,임진조국전쟁,7년 전쟁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선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592년 4월 13일연표보기 - 임진왜란 시작
발생|시작 시기/일시 1597년 - 정유재란 시작
종결 시기/일시 1598년 11월연표보기 - 임진왜란 종결
성격 전쟁
관련 인물/단체 채홍국|이유

[정의]

1592년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전라북도 부안 지역을 포함한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개설]

1592년(선조 25)에 일본이 일으킨 침략 전쟁이다. 한성(漢城)과 평양(平壤)이 함락되었으나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과 조선 수군의 활약 및 명나라의 참전 등으로 7년간 지속되었다. 강화 협상이 결렬된 이후 1597년(선조 30)에 일어난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부안을 비롯한 전라도 여러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역사적 배경]

1592년 4월 13일 일본이 경상도 동래부(東萊府)의 부산진(釜山鎭)을 공격하면서 조선에 대한 침략 전쟁을 일으켰다. 우리나라에서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고 부르는 전쟁이 발발한 것이었다. 임진왜란은 7년 동안이나 이어졌고, 명나라가 가세하면서 동아시아 삼국이 참전하는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 부산진에 상륙한 일본군은 한성까지 함락했지만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면서 전쟁이 장기전으로 전환되며 점점 불리해지게 되었다. 이에 일본군이 군수 물자 조달 등을 위해 전라도 지역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고, 전라도 각지에서도 일본의 침략 전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경과]

임진왜란 이 일어난 후인 1592년 5월에 전라도 관찰사 이광(李洸)이 8,000여 명의 근왕군(勤王軍)을 이끌고 북상하였다. 그러나 근왕군이 공주(公州)에 이르렀을 때 한성이 함락되고 선조(宣祖)가 피난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의적 결단으로 근왕군을 해산하였다. 대신, 일본군이 전라도로 침입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전라도 각 지역의 관군과 의병을 모아 전라도 경계선을 지키게 하였다. 결국 웅치(熊峙)와 이치(梨峙)에서 일본군의 침입을 물리침으로 해서 정유재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전라도를 방어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전라도에서는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김덕령(金德齡)·유팽로(兪彭老) 등도 의병을 조직하여 활약했다. 고경명은 유팽로와 함께 담양(潭陽)에서 회맹하여 의병 대장으로 추대되었고, 7월 9일 금산(錦山)에서 일본군과 격전 도중 전사했다.

일본군은 군량 확보를 위해 전라도 지방으로 침략을 확대했고, 이순신(李舜臣)[1545~1598]의 수군을 배후로부터 공격하는 동시에 강화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1593년 6월 진주성(晉州城)을 공격했다. 당시 진주성에서는 김천일·최경회 등 의병·관군 3,000명이 일본 공격군 12만 3000명에 대항해 7일 동안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진주성은 결국 함락되었고 6만 명의 인근 주민들이 학살당했다. 전라도 의병은 임진왜란 때 향토 수호뿐만 아니라 진주성 전투 등 경상도 지방으로도 진출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일본은 진주성 전투 이후 진행된 강화 협상이 결렬되자 1597년 전라도 점령을 목적으로 재침하였다. 1597년 7월 초 600여 척의 군선으로 전라도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전라도 침략을 예측하지 못한 조선 조정에서는 경상도에서 서울로 향하는 길목을 방어하기 위해 전라도 지역의 병력과 무기를 경상도 지역으로 이동 배치하였다. 더욱이 이순신이 투옥된 상황에서 원균(元均)[1540~1597]이 칠천량 해전(漆川梁海戰)에서 대패함으로써 전라도를 향한 일본군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결국 1597년 8월 남원(南原)과 전주(全州)가 함락되었고, 이후 부안을 비롯한 전라도 전 지역이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일본군은 남원과 전주의 함락과 함께 전라도 각 지역을 침입하는 과정에서 부안도 공격하였다. 이때 임진왜란 시기에 창의한 바 있던 부안 출신의 채홍국(蔡弘國) 등이 이끄는 의병이 호벌치(胡伐峙) 등지에서 일본군과 접전했고, 이유(李瑜) 등이 이끄는 의병이 청등(靑燈) 고개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결과]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1537~1598]가 죽자 일본군은 마침내 철수하기 시작했고, 조선군은 명군과 함께 육상에서 일본군을 추격했으나 섬멸하지는 못했다. 같은 해 11월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진린(陳璘)이 지휘하는 명 수군과 함께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자 노량(露梁)에서 일본 전선 300여 척과 해전을 벌였다. 그 결과 조선군과 명군이 일본 함선을 200여 척이나 격침하며 최종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순신은 전사하였다. 노량해전을 마지막으로 일본과의 7년에 걸친 전쟁이 끝나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1592년에 일본의 침략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은 한성과 평양성의 함락에도 불구하고,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 및 조선 수군의 활약과 명나라의 참전 등으로 7년간 지속되었다. 일본은 강화 협상이 결렬된 후 전라도 점령을 목적으로 1597년에 재침하여 8월에 남원과 전주를 함락하고 부안을 공격하였다. 이에 부안에서는 사족(士族), 양민, 승려 등이 의병을 조직하여 호벌치 전투청등 전투를 치르며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이런 의병의 활약으로 일본군의 사기가 떨어지며 전황(戰況)도 차즘 일본에 불리해졌다. 전라북도 부안에서 벌어진 호벌치 전투청등 전투는 일본군을 격퇴하지는 못했지만, 부안 지역의 사족, 양민, 승려 등이 온 힘을 결집하여 일본군에 대항한 항쟁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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