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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355
한자 黔毛浦鎭
영어공식명칭 geommopo-ji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진서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최범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폐지 시기/일시 1873년연표보기 - 검모포진 폐지
관할 지역 검모포진 -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진서리지도보기

[정의]

조선 전기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진서리에 설치한 수군진.

[개설]

줄포만의 북편 중간 곰소항 옆에 자리한 검모포(黔毛浦)는 고려 이래 황해의 군사 방어 요충지로서 조선 시대에는 수군진(水軍鎭)이 설치되어 있었다. 고려 시대에는 인근 제안포에 나라의 세곡을 거두어 개경으로 수송하는 안흥창(安興倉)이 있었다. 1358년(공민왕 7) 7월 왜적이 안흥창 인근 검모포에 침입하여 전라도 세미를 실은 배를 불태웠다. 그런가 하면 1379년(우왕 5)에는 왜구가 50여 척의 배로 웅연(熊淵)[검모포]에 침입하여 적현(狄峴)[되재, 지금의 유정재]을 넘어 부령현(扶寧縣)까지 점거하고 동진교(東津橋)를 헐어 버렸다는 기록도 보인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검모포변산반도 아래 곰소항에 자리하고 있어 지리적으로 황해안[서해안]의 경제적·군사적 요충지로 항구와 수군진이 설치되었다. 중국으로 왕래하는 해상 무역과 교통의 중심지이자, 남해에서 황해안을 따라 북상하는 해상 교통의 중간 지점으로서 조운선이 정박하는 항구이기도 하였다. 또한 부안의 변산(邊山)은 태안의 안면도와 더불어 오랫동안 국가에서 필요한 목재를 조달하기 위해 민간인의 산림 이용을 금지하던 곳이었다. 이 목재를 운반하기 위한 항구로 검모포는 최적의 위치였다. 고려 시대 여몽 연합군이 제1차 일본 침공을 하였을 때 약 3만여 명의 연합군을 수송한 전함 900여 척을 이곳 변산과 전라남도 장흥의 천관산(天冠山)에서 건조하였다고 전하는데, 여기서 말한 변산이 바로 보안현(保安縣)검모포였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제1차 일본 정벌을 위한 준비로 수송 전함선 300척의 건조를 전주도(全州道)의 보안현 변산과 나주도(羅州道)의 천관산 등에 설치하였다. 그리고 이를 감독하는 책임자를 임명한 내용과 배를 만드는 목수와 그에 따른 일꾼[역부(役夫)] 3만 500명을 동원한 규모를 밝히고 있으며, 선박의 건조를 빠르게 진척하기 위한 관리들의 독촉과 채찍이 가혹하여 900척에 이르는 큰 선단을 불과 넉 달 반 만에 건조하였다는 내용도 나온다. 진서면 진서리 구진마을 입구의 갯벌에서 선박을 진수할 때 사용하는 아름드리 못탕목이 수없이 발굴되는 것으로 보아 검모포에 조선소가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면, 고려 시대에는 변산반도의 목재를 실어 나르기 위한 선박을 건조하거나 목재 운반을 위한 목적으로 검모포에 진을 설치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변산반도의 지리적 특수성을 감안한다면 그 훨씬 이전부터 국가에서 진(鎭)을 설치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이유로 검모포는 삼한 시대 백제와 통일 신라, 후백제를 거쳐 고려, 조선 시대에도 중요한 항구로서 조선소의 역할과 함께 변산반도를 중심으로 황해 연안을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수군진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관련 기록]

『고려사(高麗史)』「세가(世家)」 권27 원종 15년[1274년] 6월 16일에, “대장군(大將軍) 나유(羅裕)를 원(元)에 파견하여 중서성(中書省)에 상서하기를, 금년 정월 3일에 조정의 지시를 받고 대선(大船) 300척을 건조하도록 즉시 조치를 취하였으며,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허공(許珙)을 전주도의 변산으로, 좌복야(左僕射) 홍녹주(洪祿遒)를 나주도의 천관산으로 보내 목재를 준비시켰습니다. 또 시중(侍中) 김방경(金方慶)을 도독사(都督使)로 임명하여 그 휘하의 관원과 장병들은 모두 정예들로 뽑았으며, 필요한 인부와 공장(工匠), 물품을 전국 각지에 사람을 파견하여 공급하는 데에 지장이 없도록 재촉하였습니다. 정월 15일에 한곳에 모아서 16일에 공사를 시작하였고, 5월 그믐에 완전히 끝내서 배는 대선과 소선(小船) 합계 900척 건조를 완료하였으며 사용할 물품도 모두 원만하게 구비하였습니다. 유능한 3품관들에게 업무를 분담시켜 뱃머리를 돌려서 이미 금주(金州)를 향해서 출발시켰으니, 여러 재상들은 황제에게 잘 보고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세가」 권39 공민왕 7년[1358년] 7월 26일에 “임술 왜적이 검모포에 침략하여 전라도의 조운선을 불태웠다. 당시 왜적의 침구로 인해 조운이 이루어지지 않자 한인(漢人) 장인보(張仁甫) 등 6인을 도강(都綱)으로 임명해 각각 당선(唐船) 1척, 무장 군사 150인을 주어 전라도에서 거둔 세조(稅租)를 조운하게 하였는데 왜적이 바람을 타서 불을 놓아 태우는 바람에 우리 군사가 패배하여 매우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태종실록(太宗實錄)』 태종 8년 무자[1408년] 9월 17일[임술]에 “전라도 병마도절제사 강사덕(姜思德)이 편의(便宜) 두어 조목을 올렸는데, ‘1. 흥덕진(興德鎭) 근처의 검모포는 물이 얕고 언덕이 막혀서 왜적이 하선하면 상거(相去)가 60여 리나 되어 왜적을 잡을 수 없으니, 해변(海邊) 요해처(要害處)인 장사(長沙)[무장]로 옮겨 배치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권151 부안현 조에, “관방이 하나이니 검모포요, 병선이 정박한다[關防一 黔毛浦 兵船泊立].”라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권151 전라도 관방(關防) 조에, “검모포(黔毛浦)부안현(扶安縣) 남쪽 웅연(熊淵)에 있으며 [중선 4척, 별선 4척과 군사 455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종실록(成宗實錄)』 성종 21년 경술[1490년] 9월 28일[정축]에 “부안 검모포로부터 다음이 군산(群山), 다음이 서천(舒川)이니, 3진(鎭)이 열치(列置)하여 검모포로부터 군산포까지는 수로가 몇백여 리나 됩니다. 만약 군산포가 없어서 그 사이에 적(賊)이 일어나면 서천포는 구원하는 데 미치기에 어려울 것 같으며, 비록 옥구(沃溝)의 진영이 있더라도 배가 없으면 또한 응변하기가 어렵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34권 부안현 관방(關防)에 “검모포영은 현의 남쪽 51리에 있는데 수군만호(水軍萬戶) 1인이 있다[黔毛浦營 在縣南五十一里, 水軍萬戶一人].”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6권 전라도 함평현 관방에 “임치진(臨淄鎭) 현의 서쪽 77리에 있으며, 영광군의 임치도와 마주 보고 있는데, 우도 수군첨절제사의 영아(營衙)가 있다. 관할하는 곳은 검모포·법성포·다경포(多慶浦)·목포(木浦)·어란포(於蘭浦)·군산포·남도포(南桃浦)·금갑도(金甲島)이다. 수군첨절제사 1인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7권 전라도 해남현 관방에 “『대동지지(大東地志)』 속진 법성포, 군, 고군산(古群山), 위도(蝟島), 임류도(臨溜島), 고금도(古今島), 가리포(加里浦), 남도포(南桃浦), 금갑도(金甲島), 어란포(於蘭浦), 이진(梨津), 신지도(薪智島), 마도(馬島), 목포, 다경포, 지도(智島), 임자도(荏子島), 검모포, 본영(本營) 및 속읍진(屬邑鎭) 각종 배 130척 진강(津舡)이 24척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 전라도 부안 진보(鎭堡)에, “검모포진은 현의 남쪽 50리에 있다. 만호 1, 군관(軍官) 18, 진리(鎭吏) 16, 지인(知印) 6, 사령(使令) 9, 군뢰(軍牢) 7, 우수영속(右水營屬)”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호남읍지(湖南邑誌)』에는 위의 『여지도서』 인원에 전선(戰船) 1척, 방선(防船) 1척, 사후선(伺候船) 2척, 방군(防軍)이 810명임을 밝혀 검모포 진영의 병력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조선 후기 지방지도(朝鮮後期地方地圖)』에서는 1723년(경종 3) 검모포진을 금설원평(金設院坪)으로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국조보감』 제46권 숙종 9년[1683년] 윤6월에는 “위도와 가리포에 수군 진관을 설치하여 임치(臨淄)·고군산(古群山)·목포·다경포·법성포·검모포·군산포·지도의 여덟 보(堡)를 위도에 소속시키고, 고금도·남도포·금갑도·어란포·이진·신지도·마도·회령포(會寧浦)의 여덟 보를 가리포에 소속시켰다. 이 두 진이 양남 수로(水路)의 관문이기 때문에 본도 감사와 수사에게 물어서 진관을 설치한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성록(日省錄)』 정조 23년 기미[1799년] 4월 9일[정유]에 “여러 도의 감사·병사(兵使)·수사(水使) 및 수령·변장(邊將)의 겸함(兼銜)은 별단(別單)에 의거하여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검모포 만호(黔毛浦萬戶)는 위도 진관 검모포 수군만호(蝟島鎭管黔毛浦水軍萬戶)로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만기요람(萬機要覽)』[1808년] 군정 편 4 주사(舟師) 전라 우수영 조에, “금모포 전선 1척, 병선 1척, 방선 1척, 사후선 2척.”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내용]

검모포진부안군 진서면 진서리 곰소항을 중심으로 구진마을과 원평마을 일대에 있었던 조선 시대 수군진이다. 진서리의 ‘진서(鎭西)’라는 이름도 검모포진의 서쪽에 자리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구진리(舊鎭里)[구진마을]가 바로 예전에 검모포진이 있었던 곳이며 지금은 곰소항 동쪽에 있는 바닷가 마을이다. 구진마을 뒷동산 서편 중턱에 옛 진영(鎭營)의 건물터가 있고 그 뒤로 돌로 쌓은 성벽의 자취가 남아 있다. 진영 터에서 서남쪽을 바라보면 검모포가 드넓은 칠산 바다로 뻗어 있어 황해의 요충지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아마도 백제 이래, 늦어도 고려 시대에 수군진이 설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수군진은 고려 후기 이래 왜구 방어를 목적으로 연해 및 도서 지역의 포구에 설치한 관방 시설(關防施設)이다. 수군진은 대외 관계나 정치·경제·군사적인 상황에 따라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15세기 중반인 1457년(세조 3) 진관 체제로서 체계적인 틀을 갖추게 되었다.

왜구의 침입 이 본격화된 1350년(충정왕 2) 이래 왜구가 침략하였을 때 방어하는 곳은 진변 만호부(鎭邊萬戶府)가 설치된 곳을 중심으로 그 관하의 연해 요해처였다. 전라도의 진변 만호부는 1290년(충렬왕 16) 설치되었고, 관하에 방수처(防戍處)를 두었는데 방수처를 수소(戍所)라 불렀다. 왜구의 침략으로 인한 지역의 방어는 성(城)이 심각하게 퇴락되어 있어서 유일한 방어처는 연해 지역에 설치된 수소에 의해 이루어졌다. 1361년(공민왕 10) 전라도 해안 지역에는 18개 수소가 설치되었다.[『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권27 공민왕 10년 5월 참조]

『세종실록지리지』 부안현(扶安縣) 관방(關防)에 “관방일검모포 병선박입(關防一黔毛浦 兵船泊立)”이라고 하여 수군(水軍)의 진영이었음을 밝혔다.

『속대전(續大典)』에는 조선 후기 검모포에는 전선 1척, 방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1척 등 총 5척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전선은 임진왜란 때의 판옥선이다. 노의 수는 16개이고 노 한 자루에 책임자 한 사람과 격군 4명을 배치하고 나머지를 20명 정도 배치하여 노군만 100명이었다. 여기에 전투하는 군사까지 합한다면 164~194명으로 상당수 수군이 주둔한 것으로 보인다.

[변천]

1422년(세종 4) 검모포에 만호(萬戶)를 파견하였다. 인조(仁祖) 때는 별장을 두어 지키고 제방을 쌓았으며, 전라 우수영에 속한 진으로 ‘전선 1척, 병선 1척, 방선 1척, 사후선 2척’이 배속되었다. 1812년(순조 12) 진영의 관아와 거기에 따른 모든 시설 일체를 금설원(金設院)이 있었던 금설원평(金設院坪), 지금의 진서리(鎭西里) 초등학교 자리로 옮겼으며, 만호(萬戶) 또는 첨사(僉使) 1인, 수군의 정원 830명에 병선이 2척이었다고 전한다. 수군 830명이란 정원이 그러하다는 것이고 실지로는 그 절반도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1887년(고종 24) 간행된 『부안지(扶安志)』[정해지(丁亥志)]의 관방에는 “검모포영은 현의 남쪽 51리에 있다. 수군 만호 1인이 있었다. 지금 임금[당저(當宁) : 고종] 계유년에 혁파하였다[黔毛浦營 在縣南五十一里 水軍萬戶一人 當宁癸酉革罷].”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검모포진은 1812년 진서리(鎭西里)로 옮겨 갔고 1873년(고종 10) 혁파(革罷)[폐지]되었다.

[의의와 평가]

검모포진이 있던 구진리(舊鎭里)는 지금의 진서면 사무소가 있는 곰소[熊淵]로부터 동쪽으로 1.5㎞ 떨어진 바닷가 마을로, 마을 북측 구릉에 검모포진 터가 남아 있다. 검모포는 삼국 시대 이래 해상 무역과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며, 마한을 넘어 백제와 통일 신라를 거쳐 늦어도 고려 시대에는 군사적 진영(鎭營)이 설치된 관방 시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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